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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담쟁이를 사랑하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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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니 (jx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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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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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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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 심지어는 대학교 시절에도, 담쟁이는 학교 교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존재하던 빨간 벽돌로 지은 2층 내부는 모두가 목조 건물이었는데, 겉으로는 담쟁이가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봄이면 마치 달팽이가 촉수를 내밀고 기어가듯이, 담쟁이가 빨판을 뻗어서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앙징맞다고나 할까, 며칠뒤면 서너개의 촉수가 콩크리트 벽에 빨판을 붙이고는 다음 새순을 내밀고 있다. 어떨때는 연초록, 어떨때는 노랑색, 어떨때는 하얗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가는 빨간 빛까지 띄고 있는 그들 새순들을 보면서 나는 삶에 대한 신비로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 연초록 신선한 새순들은 마치 사철나무의 겨우내내 묵었던 짙은 초록을 뒤로 하고 봄을 안내하는 병아리같이 포근한 연초록에 비해 너무나 여리기만 하고 앙증맞은 모습이기도 했었다.
그 시절 내내 담쟁이의 짙은 녹음을 바라다 보면서 어린 시절 36도를 넘나드는 실내온도를 잘 참아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우리의 여름을 시원하게 해주던 3가지 나무를 들라고 하면 나는 담쟁이, 히말라야시다, 그리고 플라타나스를 들고 싶다.
다른 두가지의 나무들이 굵은 줄기와 시원스래 뻗어나가는 가지들 사이에서 여백을 채워주는 의미로서의 잎들이었다면, 담쟁이는 좀처럼 굵은 가지를 찾아내기 힘들고, 더구나 그 굵은 줄기를 찾아내었다손 치더라도 과연 이 줄기로부터 내가 보고 있는 2층 창가의 담쟁이가 뻗어나갔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도 담쟁이 잎들이 다 떨어져버린 겨울이 아니고서는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말하는 인터넷의 넷(net)이 그물이란 의미이고, 우리가 어떤 사이트명을 집어넣었을 때, 그 사이트명은 그물처럼 서로 얽히고 맞물려 있는 망의 각종 통로를 이리저리 헤매면서 내가 원하는 사이트로 향하게 되고, 그 사이트로부터의 정보도 한곳만이 아닌 여러 다른 경로를 통하여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오게 되기에 사실인즉 바로 옆 컴퓨터와의 교신에 있어서도 전 세계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돌아서 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사실도 이무렵에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담쟁이의 원줄기를 대부분 몇몇개의 처마 끝으로부터 낙숫물을 받아내리는 물홈통주위에서 찾아낼 수 있지만, 초창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담쟁이 원줄기는 이미 다른 줄기로부터 시작된 다른 가지들과 서로 겹쳐 있어서 마치 그물처럼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겨울날 유심히 관찰을 해봐도 내가 바라보는 2층창가까지 올라오게된 그 줄기의 원뿌리는 좀처럼 찾아낼 수 없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담쟁이의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일본식, 혹은 군대식 교육을 많이 받아서인지, 계급, 등급, 순위, 등에 관한 판단을 늘상하면서 살아왔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키더라도 누가 반의 회장, 부회장, 분단장, 부장, 총무, 그런 것들을 되살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평가 방식의 하나인데, 우리가 무슨 일본의 명치유신 시대와 같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밀어붙이기 작전을 해야할 이유도 없고, 전쟁터와 같이 일사분란한 지휘체계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에, 학교란 것은 우리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냥 함께 서로 오손도손 얽히고, 엮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는 곳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보기좋은 모습인지...
그래서 난 담쟁이의 끈질긴 생명력과, 겨울의 무소유, 봄의 앙징맞은 새순, 여름의 두터운 녹음, 가을의 낙엽, 그리고 낙엽이 지면서부터 마지막까지 남은 열매들은 봄부터 꽃이 피고 열매맺어서 검게 익을 때까지의 세월을 얘기해주는 그런 모습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생명력의 가장 큰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담쟁이가 빨판을 이용해서 모든 벽마다 거의 잎 한장마다 서너개씩 뿌리를 박고 있는 그 과학적인 아니 어찌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 빨판의 논리 덕분에 담쟁이는 그 거친 콘크리트에 뿌리를 대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영양분의 공급이 끊겨지더라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채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그 마지막 잎새가 결국은 담쟁이였었기에 그 앙큼한 아가씨가 자신의 죽음을 담쟁이 남은 잎새의 숫자에 걸고 있었고, 그를 알게된 노인은 담벼락에다 마지막 잎새를 그려놓을 수 있었고, 폭풍우에도 떨어지지 않는 낙엽의 모습을 보면서 간신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플라타나스 나무였었다면 낙엽을 붙잡아 놓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반드시 벽이든 기둥이든 돌이든 무엇인가를 타고 올라가는 그 모습과, 자기 온몸을 불살라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그 희생, 마침내는 기존의 벽돌이든, 나무든, 돌이든, 원래 모습을 담쟁이로 둘러싸인 하나의 새로운 형태로 끌고가는 창조력, 그 어느곳에도 스스로 잘난채하는 우두머리 줄기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이 내게는 정말 보기좋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담쟁이의 흉내를 내보면 어떨까,
아무리 어려운 곳이라도 함께 손잡고, 조심조심 정겹게 한발한발 오손도손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담쟁이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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