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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와 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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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사람 (hoy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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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9-04
본문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소위 우리 인생이 형통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때, 성공이 우리를 부르고 손짓할 때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순간 우리의 노래를 그치게 만들고, 춤을 추던 우리의 동작이 손을 들어 가슴을 치게 만드는 가슴 아픈 고통이 한순간 우리의 삶의 장에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경험입니다. 출 15장 1-21절은 어떤 사건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이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여기 보면 노래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에 대한 감사의 노래요, 감격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적들을 홍해바다에 수장시키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능하신 팔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출애굽기 15장 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했다고 합니다. 한 순간 노래를 그치고 그 속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고통이 찾아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출 15장 22절에 보시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홍해바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후에 꼭 사흘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지 사흘만에 상황이 지금 역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타는 갈증이 그들을 지금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마라라는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물이 있어서 물을 마셨는데, 쓴 물이어서 그들은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뻐했던 이 백성들이 불과 사흘만에 지금 탄식하고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원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그림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가는 이런 신음과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의 춤 동작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런 고통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지금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을 제가 알아요. 저는 이 순간도 주님의 사랑을 믿어요." 이 사람은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형제의 아버지는 심한 알콜중독자였습니다. 날마다 술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그러한 아버지를 향해서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과였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두 형제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큰 아들은 어느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였던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며 금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술주정뱅이였던 자기 아버지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도 역시 심한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폐인처럼 되어서 병원신세나 지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은 자기들의 현실을 앞에 놓고, 똑같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술주정뱅이인 내 아버지 때문에." 형은 마라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마라를 탈출했습니다. 엘림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힘차게 전진했습니다. 결국은 엘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몇 해 전에 안데스산맥에서 비행기가 추락을 했습니다. 몇 사람이 죽었습니다. 산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먹을 것이 없으니까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겨우 생명을 유지했는데 나중에 구조대가 그 생존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가보니까 바로 6마일 떨어진 곳에 유명한 호텔이 있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고 더러는 배가 고파 죽기도 하고, 사람고기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으면 절대로 엘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마라에서 조금 지나가서 이 엘림에 도달했더니 엘림에 뭐가 있었습니까? 물샘이 열두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두 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 몇 개가 있어요? 칠십 주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오아시스일까요?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입니까? 이 마라 바로 저 건너편에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엘림, 이 풍성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고통의 현장에서도 엘림의 오아시스를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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