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5
- 김연아선수의 장한 금메달 소식과 떠오르는 분
페이지 정보
- 정 (irisjungmin)
-
- 1,428
- 0
- 0
- 2010-02-27
본문
김종성 애국지사와 가족
지난 사일 天皇陛下(천황폐하)께옵서 大阪行幸(대판행행-오사카에 행차) 하옵섯던 중에 길가에서 거동이 수상한 남자를 발견하고 체포 취조중인데 그는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 김종성으로 품에 한자 이상이나 되는 단도를 품고 잇서 御鹵簿(어노부-천황의 나들이 행렬) 앞에서 할복자살(割腹自殺)할 목적으로 배회한 것이 판명되었으며 또 동인은 ○○○○운동자의 한 사람으로 그 뒤에 비밀결사가 잇는 듯 하야 더욱 취조를 진행중인데 동인은 십 구세 때에 목포부(木浦府) 순사 吉岡勝의 소개로 대판에 와서 과자집에서 고용사리를 하다가 그 이듬해에 고향에 돌아왔다가 재작년에 다시 대판에 가서 전기 과자 집에서 냉대하는 것을 분개하야 이리저리 돌아다니든 중이라더라(대판발)
1929년 6월21일자 <조선일보> 기사 ‘전문’(일부 표기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괄호로 설명하거나 현대문으로 고쳤음)이다. 신문에 ○○○○으로 표기된 부분은 ‘조선독립’으로 짐작된다. ‘일왕 히로히토 주살 미수’ 사건은 <조선일보>뿐 아니라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히로히토는 단순한 통치권자가 아니라 신의 아들(天子)이었다. 일제가 조선 민중들에게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면서 황국신민의 영광을 받들라고 한 배경에는 천황이 있었다. 그런 식민지 백성이 천황폐하를 주살하기 위해 칼을 품은 사실을 그대로 밝히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신문들은 ‘일왕 주살’ 기도는 쏙 빼버리고 사회 불만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으로 몰아갔다.
묻혀진 역사…히로히토 처단에 나선 조선 청년
김종성(1906~1977) 지사의 ‘일왕 히로히토 주살 미수’ 의거는 단독 거사였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조직의 소행으로 몰기도 했지만 사실은 ‘큰 뜻’을 품고 적국(敵國)에 건너온 한 조선 청년의 준비된 의거였다. 특히 김 지사의 의거는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봉창 의거(1932년)보다 3년 앞서서 감행된 역사적인 의거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나 자료란 거의 없는 ‘묻혀진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봉창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한인애국단원이었던 이 지사는 백범의 지도 아래 히로히토를 처단하기 위한 거사를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감행했다. 그렇다면 김종성 지사에게 적국의 수괴를 처단하겠다는 기백을 심어준 정신적 지주는 누구였을까?
김 지사의 정신적 지주는 무명 한학자로 추정된다. 김 지사의 고향 전남 무안 해제에서 훈장 생활을 하던 잠와(潛蝸) 김용수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 짓밟히자 왜놈 세상을 보지 않겠다며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사옥도라는 작은 섬에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던 꼿꼿한 선비였다.
스승 잠와는 제자 김종성에게 한학뿐 아니라 일제에 대한 의분과 독립 의지를 가르쳤다. 김 지사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컸던 것 같다. 19세이던 1924년 스승에게 ‘나라를 되찾는 큰일을 하고 오겠다!’고 하직인사를 마친 김 지사는 자신이 신던 고무신을 벗어놓고 대신 가난한 스승의 짚신을 신은 채 적국 일본으로 향했다. 이 같은 사실은 조부의 기록을 정리한 잠와의 손자 김화중(66·교감으로 정년퇴직)씨를 통해 밝혀졌다.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김 지사는 조선 민중들의 참상을 목격했다. 일본인들에게 천대와 학대를 당하는 민족의 아픔 앞에서 의지를 거듭 다진 김 지사는 24세가 되던 1929년 6월4일 일왕이 오사카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날 오전 9시 히로히토(裕仁)를 주살(誅殺-죄를 물어 죽임)한 뒤 할복자살로 최후를 마치기 위해 비검(匕劍)을 품고 환영 군중 속에 대기하던 김 지사는 거사 직전에 일경에 체포되면서 일왕 주살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오사카 형무소 698호 감옥에서 6년간의 옥고를 치르던 김 지사는 1935년 특사로 풀려났다. 히로히토는 이 해 둘째아들 득남의 경사를 맞아 자신과 관련돼 투옥된 이들을 사면토록 했다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은 평생 그를 괴롭히고
애국청년은 폐인이 되어 귀향했다. 고문과 옥고를 견뎌냈지만 그 후유증은 김 지사를 평생 괴롭혔다. 그의 집안은 일제 치하에서도 고무신을 신을 정도로 부유했다. 그러나 그의 의거로 인해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일제의 보호관찰 대상이었던 그가 1939년 33세의 늦은 나이에 17세 처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장인 덕분이었다. 전남 함평 출신의 장인은 의거 사실 하나로 김 지사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동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서당을 열어 한학을 가르쳤으나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수입은 없었기 때문에 생계의 책임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시집 갈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나라를 위해 큰일 한 사람이니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결혼했어요. 고생이요?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어떻게 다할 수가 있겠어요. 내가 일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굶어 죽기 때문에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어요.”
애국지사의 아내 김처례(90) 여사가 키운 것은 3남2녀만이 아니었다.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그의 역경이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손이 대신 증명했다. 남편을 대신해 농투사니로 살아온 그의 손은 녹슨 호미처럼 휘어져 있었다. 게다가 큰아들(용수)과 막내아들(현삼)이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그 충격으로 인해 청각이 크게 손상됐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늙은 아내는 아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도 정신도 꼿꼿했다.
“아버지가 마을 잔칫집에 가면 굶주리고 있을 저희들 생각에 음식을 싸가지고 오시곤 했어요. 저희들은 그런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몹시 나무라셨어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신 사람이 품위를 지켜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자갈논 두 마지기로 자식 다섯을 키운 어머니는 남의 신세를 지기를 싫어하는 대쪽 같은 분이십니다.”
1977년 향년 72세로 삶을 마친 고산(高山) 김종성 지사. 그는 의거에도 불구하고 초야에서 묵묵히 살았고, 독립된 조국은 그의 의거에 관심이 없었으며, 가족들은 궁핍에 시달렸다. 정부는 1990년 애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지만 그것은 정부의 발굴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수고로 인한 것이었다. 1994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종성 지사의 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초야에 숨쉬는 몸이
한 자루 칼에 혼을 실어
젊은 육신을 분연히 내어주고
영어의 뒤안길 혹한 세월에
할퀴우고 얼어붙은 심신을
광복의 빛자락에 포근히 녹히고
빈손 모두어 눈을 감으니
혼은 우리의 가슴에 묻히어 살고
몸은 초야에서 숨쉬리라
막내아들 고 김현삼 목사는 민주화운동에 헌신
“한신대를 다니던 동생(현삼)이 시국사건에 연루되면서 수배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집에 나타나자 잠복근무하던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동생을 잡으러 온 용산경찰서 형사가 ‘너를 잡아넣으면 진급이 되겠지만 너의 아버님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다 옥고를 치렀는데 어떻게 너까지 감옥에 집어넣겠느냐. 앞으로 데모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그냥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김봉수(67·하름교회 장로)씨의 증언이다. 박정희 독재정권하에서 벌어진 감동의 일화다. 김 장로는 신학생인 동생과 함께 서울 용산의 자취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용산경찰서 담당 형사가 집안 배경을 조사하기 위해 고향을 찾아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이로 인해 동생은 운동권 동료들로부터 ‘프락치’로 오해를 샀지만 아버지의 내력과 형사의 발언을 통해 오해가 풀렸다고 했다.
하지만 애국지사의 막내아들은 형사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 문익환 목사를 따르던 김현삼 목사는 목포 죽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남회장과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김 목사는 1996년 46세의 일기로 갑작스레 타계했다.
40년째 서울 생활중인 김봉수 장로는 집안의 기둥이다. 현대자동차 정비기술자로 시작해 중동 노동자 생활을 거쳐 벽돌공장 사장을 지내면서 가난한 가정을 일으켰다. 병든 아버지를 서울 병원으로 모셔다 치료해드리랴, 어머니를 25년째 모시랴, 두 동생(고 김현삼 목사와 김숙례 목사)의 학비를 대랴…. 김 장로는 애국의 피를 흘린 아버지가 효자의 피와 형제 우애의 피뿐 아니라 강직한 마음을 물려주셨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아버님이 나라와 정의를 위해 흘린 피를 인정받게 되어 다행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