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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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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수들중에서도 가장 으뜸되는 기예와 재주를 가진 설장구! 그 설장구수가 노는 놀음놀이가 "설장구놀이"이고 이를 그냥 "설장구"라고 표현하기도 하낟. "설장구"라고 할 때는 으뜸되는 장구수라는 의미와 가장 멋들어지게 노는 장구놀음이라는 의미가 함께하고 있다. 장구놀음이 특히 발달한 지역이 전라도이다. 그리고 기예를 팔아 생존을 영위했던 유랑집단인 남사당패의 놀이 중 풍물놀이의 설장구(사당패에서는 으뜸장구수를 "고장구님"이라고 함)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남사당패의 연희란 전국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의 굿에 기반한다기보다 각처의 뛰어난 기예를 종합적으로 수용했으며 장구놀음은 전라도의 발달된 장구놀이를 기본으로 했슴이 틀립없다. (<경상도 벅구><전라도 장구><경기도 꽹과리>라는 말이 남사당패내에서 전해짐.)
근세에 전라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풍물놀이꾼이 설장구라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70대 이후의 굿꾼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포수나 상쇠보다 더 인기가 있었으며 돈벌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유명한 상쇠들의 죽음을 추적해 보면 여성들의 인기를 누리다 잘못 유부녀를 건드려 타살당한 경우가 허다했으며, 야반도주 엮시 다반사였고, 입문하는 젊은 장구수는 선배 장구수들로부터 여자조심의 경계가 간곡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례는 전문굿꾼들의 활동이 두드러진 연희풍물굿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슴은 물론이다.
전라도 풍물굿은 크레 4지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좌도굿지역"과 영광. 고창. 장성을 경계로하여 북쪽을 "웃녘굿지역", 이남을 "아랫녘굿 지역", 그리고 전라도 해안지방의 "군고지역"이 그렇다. 설장구를 살펴보면 각 지역마다 특징들이 있다. 웃녘굿의 경우 정읍을 중심으로 설장구가 발달했고, 현재의 설장구놀이를 정리한 중시조로 "김홍집"을 꼽고 있으며, 가락중심의 음악적인 측면이 발달했음을 알수 있다. 유명한 장구수로 "이봉문","안봉구","이정범","전사섭","김병섭"등이 있다. 아랫녘굿은 음악적인 면보다는 춤을 더 중시한다. 가락중심으로 치는 웃녘굿의 설장구를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웃녘굿의 설장구수들은 아랫녘에서 관심을 얻지 못했다. 설장구의 멋을 가락보다는 몸짓과 춤에다 두는 미학이었다. "김만식","김학준"이 유명하며 최근까지 활동한 "김오채"가 있다. 군고지역의 설장구는 머리에 상모를 쓴다. 개꼬리 상모보다도 더 짧은 한뼘정도의 물체를 단다. 장구의 궁굴채는 거의 막대기나 진배없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장구가 소리를 내기위한 악기라기 보다는 가지고 놀기 위한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무리가 아닐 정도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서 원래 설장구란 음악적인 측면보다는 몸짓과 춤이 더 기본적이고 깊은 멋의 근원이며, 신명의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발현 방식임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설장구는 가락위주로 발전한 전라도 웃녘굿의 설장구와 남사당패에서 나온 설장구, 그리고 여성농악단의 설장구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몇가지로 요약해 보면, 해방후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개최된 "전국농악 경연대회"에서 "정읍농악"(이봉문이 다듬은 판제)이 우승함으로서 얻은 전국적인 지명도와 그에 힘입어 일찍이 서울로 진출한 정읍지역의 설장구들이 (대표적인 인물이 전사섭, 이정범, 김병섭)개인학원과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잦은 공연활동을 함으로서 미친 파급표과를 크게 꼽을 수 있다.
1960년대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농악단의 설장구는 그 뿌리를 정읍설장구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풍물굿을 음악중심으로 이해하는 관점의 폐해도 간과할 수 없다. 음악중심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가락중심의 설장구놀이에 주목하게 되고 가락중심의 설장구를 선호하게 된다. 이 흐름은 결국 전적으로 음악적인 측명에 초점을 맞춘 사물놀이의 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군정 체제 이후 모든 문화의 유통망과 유통방식이 마당성을 잃어가는 공연형식과 상품화의 길이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제는 정착됐다는 사실이 음악중심의 풍물로 이해하는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음을 간과할 수 없다. 웃녘설장구보다 아랫녘설장구를 배우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아랫녘 설장구(특히 김오채)의 몸짓을 보면 몇십년 동안 승무나 살풀이를 춘 전문춤꾼의 몸짓이 나오고 있다. 가락만의 수련으로 아랫녘굿의 설장구를 소화해 내지 못한다. 또한 이런 깊은 맛으 이해할 수 있는 관객의 감식력도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리를 하자면 설장구란 화려한 가락의 변주만이 능사가 아니며 춤과 가락과 흥이 하나로 녹아들어 어우러져야 하며 그런 설장구놀이가 존재했었으며 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런 맛은 아직도 두레풍물굿의 전통이 전승되고 있는 현장에서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판굿"이란 원래 기예를 자랑하고 구경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판에 모인 모든 굿꾼과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극치를 만끽하는 절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두레풍물굿 판의 개인놀이의 연희방식은 끝소고부터 차례대로, 한사람씩 한사람도 빠짐없이, 판안에서 노는(놀리는)것이 원칙이고 그 원칙이 철저히 지켜진다는 사실과, 연희풍물굿의 설장구 엮시 쌍장구, 삼장구, 사장구놀이방식은 최근에 나타난 모습임을 잘 음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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