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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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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찌 됐든,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뢰의 차이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지난 몇 달간 오가며 느끼는 것은,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택시를 하면 10의 9은 택시 기사와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택시 운전사는 미터기를 켜기를 거부하거나 알 수 없는 길로 돌아가거나 내릴 즈음에는 꼭 잔돈이 없다며 돈 거슬러 주기를 거부한다. 한 번은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폴로 들어오는데 새벽이라 차편이 없는 것이다. 단지 몇 키로 안 되는 통관까지만 택시를 타고 가려는데 싱가폴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알고 100불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요구한다. 100불이면 우리 돈으로 6만원 가량 하는데, 평소 같으면 5불도 안 나올 거리를 뻔뻔히 요구하는 택시 운전사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도 없었다. 결국 어느 말레이시아 여성의 덕으로 - 여전히 비싼 - 15불 가량을 주고 겨우 통관까지만 올 수 있었지만.

그뿐이 아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버스 출발 시간이란 - 예를 들어 12:30분이 버스 출발 시간이라면 -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출발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한 자리도 남김 없이 다 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 터미널에는 언제나 수많은 호객꾼들이 now, now를 외치며 호객 행위를 하지만 결국 타보면 30분, 아니 1시간까지 기다려야 출발하는 경우들이 생긴다. 버스 터미널에 가면 거짓말에 일상적으로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관광객이 있는 곳이라면 숙박 시설이든 어디든 여지 없이 몇 푼 더 없으려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간혹 정직하고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면 얼마나 감사한지.. 오히려 최근에 느낀 것은 진정한 말레이시아를 느끼려면 관광 산업이 개발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순수하고 떼묻지 않게 외지인을 대해주며 (심지어 외국인을 신기하게 여기며 친절을 베풀기도 할 것이다), 말레이사의 독특한 역사를 몸소 겪은 곳이라면 어디든 그 풍성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여지껏 내가 본 곳 중 많은 곳에서는 돈 맛을 경험한 사람들의 속임이 횡횡한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는 그 사람의 눈빛과 표정만 보면 안다. 특히 말레이시아에서는 그게 너무나 연습이 된다. 이제 척 몇 마디의 대화만 나누어봐도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친절한 도움 후에는 웃돈을 주어서라도 보상하고 싶어진다.

이제 막 개발도상국의 반열에 올라선 말레이시아,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풍부한 문화로 관광 사업만 꾸준히 해도 걱정 없을 것 같은 나라, 그러나 돈 맛을 봐버린 일부 상인들과 호객꾼들의 행위는 나 같이 비교적 털털한 여행객으로도 하여금 가끔 진저리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역시 난 신뢰라는 것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몸으로 느꼈다. 신뢰란 당장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장기적으론 가장 확실한 이익을 거두어들이고 또 그러한 이익을 가장 오랫 동안 유지하는 길이기에, 지금 당장 사소한 몇 푼에 거짓으로 인격을 포장하고 팔아버리는 몇몇 상인들의 행동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또 하나 느끼는 것은, 싱가폴이 자유가 없고 법이 지나치게 꼼꼼하고 강하다는 조롱과 비판을 듣는데 말레이시아를 여러 번 갔다 오면 왜 싱가폴이 지금의 싱가폴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가 있다. 리콴유 총통의 머리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이다. 싱가폴은 말레이시아로부터 어설프게 떼어져 나온 이후로 모국에 대한 애증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어왔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해 말레이시아의 그릇된 관습과 사회적 병폐를 거울삼아 그것을 최대한 피하고 누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부단히 만들어 왔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강권력과 법제도를 통해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한 말레이시아적 폐단의 유입을 차단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싱가폴을 국제적인 마인드에서 비판을 하기 전에 말레이시아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왜 싱가폴이 싱가폴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는 키는 말레이시아에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한 명의 관광객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불합리와 폐해는 그가 일단 싱가폴 국경에 들어온 순간부터 완전히 뒤바껴져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싱가폴인들의 합법적인 상술을 통한 막대한 차익 남기기는 잠시 둘째로 치워두자)

그러나 나는 말레이시아를 일방적으로 욕하는 게 아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불친절과 부정직함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토로하는 것도 아니다. 말레이시아도 싱가폴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지리적 성격에 상대적으로 얽매여 발전한 것일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식민 지배와 여러 열강에 의한 침략 등이 - 그것이 문화적 풍성함에 일익했을는지는 몰라도 - 또 한편으론 수많은 식민지적 잔재와 의식을 남겨왔으리라고도 생각한다. 그러한 식민지적 근성이 현대 서구 자본의 유입에 따라 서구적 이데올로기와 어설프게 결합하여 엉뚱한 면모들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간다.

말레이시아 최대의 자연림 공원을 어떻게 훼손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를 논하는 자리에서 민영화를 하자는 대안이 나왔다는 얘기를 Lonely Planet에서 보고 느낀 바도 그러하다. 다시 말해 서구의 어설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어설프게 학습한 지배계층이 이제는 식민 이데올로기에 이어 자신의 토양에 바로 심을 수 없는 서구 논리를 이식시켜 국가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수도 쿠알라 룸푸에 있는 Twin Towers를 보았는가. 실로 인류 건축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 정도로 놀랍다. 멀리서 보면 마치 이슬람 문화를 찬양하는 거대한 사원이나 조각 같이 아름답고 웅장한 Twin Towers. 어떠한 건물에도 특별히 감흥을 느껴보지 나로서도 절로 탄성이 나오고,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그밑에 존재하는 말레이사를 보면 여전히 심각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부조리가 횡횡한다. 가장 근대적인 건축 기술로 자신의 선진성을 홍보하지만 여전히 그 밑의 사회는 그러한 선진 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문제들로 시달린다. 그리고 길거리에 넘쳐나는 차를 보라. 자동차 산업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도로도 안 만들어놓고 차를 대량으로 생산해 헑값에 파는 바람에 KL은 세계 최대의 교통 지옥이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은 이 두 사례만 놓고 보더라도 할 수 있다. 결국 당장 해결해야할 전근대적인 이슈보다 서구의 흉내를 내기 위한 근대적 시범 사업들이 말레이시아를 뒤틀어 간다.

그러나 여전히 말레이시아에 희망을 거는 이유는, 그 자신에 대한 나름의 대범함과 자부심, 그리고 무엇보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강한 믿음이라는 것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싱가폴 사람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어떤 대범함, 털털함, 여유로움이 말레이시아 사람에겐 있다(석유가 뿜어져 나온다는 것도 그 자신감에 한 몫하겠지만 후후). 실랑이를 벌여도 한 번 웃어넘긴 후 친근한 마음으로 대해주면 그는 당신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교육의 질 또한 주변 국가에 비해 높아 보인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서구 문명에 모조리 빨려들어가지 않고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터전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슬람 문화를 어떻게 지렛대로 활용하여 서구 문명을 이용하고 또한 대적하며 조절하느냐가 말레이시아의 최대 철학적 과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긱이다.

단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만 이야기하려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이라는, 이 지역 최대의 패권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으로 흘렀다. 어찌 되었든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을 오가며 - 과연 이 나라들에 와서 어떤 걸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 하고도 한 때는 걱정했지만 - 여러 가지를 상대적으로 느끼는 묘미가 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느낌은 신뢰의 중요성이다. 신뢰란 무형이지만 가장 가치 있는 미덕이고 한 국가의 인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한국이란 사회는 신뢰에 있어 어디에 와있는가, 그것이 내가 돌아가서 다시금 물어아야 할 질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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