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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사는 이야기-(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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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강(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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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9-27

본문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보고 바로가라-

나는 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지에 대해 고민의 고삐를 늦춘 적이 없다. 아무리 바싹 조여도 해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짜증스럽게 헷갈리기 일쑤였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도드라진 답은 그 아무데도 없었다. 재력이 풍족한 이웃도 보았고 권력이 대단한 인물들도 보았다. 그들에게서도 나의 의문표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의문표는 꼬리를 물고 물어 만리장성을 이뤘다. 어느 하나도 ‘이것이다’라는 명답이 없어서다. 내 나이 일흔 둘이니까 이 의문표를 달고 살기는 아마 예순 해쯤은 된 것 같다. 그럼에도 정답을 찾거나 얻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정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면 너무 많은 탓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마다 지향하는바 목표와 이상이 다르고 삶의 가치관이 딴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랬다. 돈만 많이 벌면 모든 것을 다 얻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다. 권력만 쥐면 세상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줄 알았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랬다. 적어도 외관상은 말이다. 청소년기는 확고한 신념이었고 불과 십여 년 전까지도 비록 엷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여겼다.  

내가 전깃불을 보았을 때는 열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 따라 면사무소에 갔을 때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유리주머니에서 불빛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밤이면 답답하고 불편스러웠다. 호롱불이 갑자기 어두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도 호롱불 밑에서 책 읽고 숙제하고 아무 불평이 없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돌변한 것이다.
촌 변소(화장실)는 아래채에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법 잘 산다는 우리 집만 그랬다. 남들은 뒷간이라 하여 안채에서 뚝 떨어진 마당 한 편에 달랑 한 칸 있었다. 변기라는 것도 나무 몇 개 얽어서 걸쳐놓은 정도였다. 일을 볼 때면 오물이 엉덩이를 탁탁 치기도 했다. 한겨울에는 오들오들 떨기 일쑤였다. 그뿐인가 화장지는 구경도 못했다. 지푸라기를 싹싹 비벼서 사용하면서도 살갗이 상하지 않은 것을 보면 참 용하기도 했다. 50년대의 웬만한 농촌 살림풍경이다. 그러다가 꿈에도 그리던 도회지로 나갔다. 살림을 망해먹고 쫓겨나다시피 간 곳이어서 열악한 환경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곳엔 전깃불이 있었고 연탄도 있었다. 그러나 화장실 해결은 못했다. 소위 공중변소였다. 아침이면 줄을 겹겹이 서야했다. 그러니 마음 놓고 볼일인들 보겠는가. 아침은 늘 불안의 대상이었다.

도시에 나갔어도 통학거리는 십 리길이었다. 하굣길이면 목에서 침 넘어 가는 소리가 꿀꺽꿀꺽 났다. 중국집에서 새어나오는 자장면 냄새가 배고픈 아이들을 허기지게 했다. 그 때 소원은 자장면 한 번 실컷 먹는 것이었다. 그 냄새를 피하려고 한참을 돌아오기도 했었다.
겨울방학 때 이웃 형 따라 장터에 갔다.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작업복을 팔았다. 질기고 싸다며 목이 터지라 호객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부끄럽고 어색하던지 멀찌감치 물러서 있기도 했다. 고등학생이던 그 형은 아무 거리낌 없이 목청이 터지도록 고함을 치고 넉살을 떨었다. ‘빨리 빨리 사가세요. 우물쭈물하다가는 못삽니다. 이것 하나면 10년은 입습니다.’  
그 날 나는 소원성취를 했다. 그토록 먹고 싶던 자장면을 곱빼기로 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자장면을 멀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배탈이 나는 바람에 며칠을 고생했다. 그 때부터 그렇게 좋던 자장면 냄새가 역겨워 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일랑 참 간사하고 용렬하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속마음을 알아준 그 형의 고마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억척스럽게 살던 그이를 떠올리노라면 "그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죽기 살기의 장돌뱅이 생활을 시작했을까?" 물론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장삿길을 나섰던 것은 나름의 꿈과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10년 후 그의 소식을 들었다. 돈벌이에 재미 붙여 대학진학도 포기하면서 장사꾼이 돼서 꽤나 많이 벌었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어쩌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술만 마시는 폐인이 되다시피 하였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때의 궁금증이다. 노력만으로도 안 되는 삶이라면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그렇다 삶이란 변수의 연속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내일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뉘가 실수하고 못 살겠는가. 하기야 내일을 안다면 더 재미없을 것이다. 아니 산다는 의미도 반감될 것이다. 내일의 나를 모르기에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면서도 가벼울 수 있는 것은 내일이라는 미지가 있어서다. 그 희한한 마법에 걸려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나는 어릴 적 꿈이 무산될 때 제삼의 길로 고쳐 들었다. 돈보다 명예와 권위 쪽을 택했다. 기자라는 직업이었다. 좀 배고파도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과 사회정의에 편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 초심은 점차 초점을 잃어갔다. 없는 자 편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 재력과 권력자 편에서만 소득이 있었다. 가난은 가난만 부추기는 꼴이 됐고 정의는 구호의 메아리였다. 노동운동을 정당화하고 미화한 결과는 그들에게 실직과 고통만 안긴 결과를 가져왔다. 부패와 비리의 폭로와 비판은 압력으로 다가왔다. 팬을 부러뜨렸을 때는 가난의 눈물만 기다렸다. 한낱 실없는 객기였다. 선배의 말이 맞구나 싶었다. 세상살이 독불장군 없고 시류 따라 산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마음 고쳐먹고 복직했다. 하지만 타고난 반골기질은 끝내 그 길을 떠나게 했다.
자식들은 커가고 씀씀이는 많아졌다. 돈이나 벌자며 전문건설회사를 인수 사업가로 변신했다. 돈 벌기란 사명감과 명예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공사를 따내고 입찰을 하는 것은 너 죽고 나살자는 철저한 개인이기주의의 현장이었다. 공사수주는 아첨과 뒷거래의 온상이었고 입찰은 담합의 거래처였다. 소위 떡값이라는 불법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판을 쳤다. 하지만 그곳에 어울리지 않고는 왕따 신세가 된다. 모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불문율이 엄연히 존재했다. 보다 못해 이견을 드러내면 기자출신이라며 소곤대고 멀리했다. 동화되지 않고는 달리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도둑의 소굴에 들어가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속담이 딱 맞다 싶었다. 그렇다면 두목이 되어 뜯어 고쳐보자고 마음먹었다. 업계에 진출한지 7년 뒤, 전문건설협회 시회장(市會長) 경선을 통해 당선되었다. 단체장이 되면서 시장이 매달 초청하는 기관장 모임에 나갔다. 업계의 정화와 업역(業域)확대에 머리를 싸맸다. 업계의 숙원인 입찰 개선책과 발주처 발주물량 확대방안에 힘썼지만 별반 효과가 없었다. 업계의 해묵은 고정관념에서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경제계에서 의욕과 명분만으로 기존의 틀을 바꿀 수는 없었다.  
칠십 평생 동안 겪은 일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성공과 실패의 연속이었고 꿈과 희망의 반복이었다. 성공에 자만하기도 했고 실패에 좌절하기도 했다. 시행착오가 참 많았던 인생이었다. 그 때마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잘 사는 것이냐고? 양심껏 살려하면 주변 환경이 용납하지 않고 양심을 버리려니 자존심이 용서치 않으니 어쩐단 말인가? 아무리 골머리를 앓아도 시원스런 대답은 없었다. 맑은 물과 구정물이 섞여서 바닷물이 되듯이 세상사 밝은 면과 어두운 면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내 자신은 물론 주변의 숱한 흥망성쇠를 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의문표는 던졌다.  

아내는 지금도 말한다. 제발 성질 좀 죽이라고 이른다. 길거리에 담배꽁초와 휴지가 휘날리면 혀를 찬다. 그리고 말한다. ‘이런 몰상식한 인간들 봐라’ 아내는 ‘세상이 그런데 말하는 입만 더러워진다’며 못마땅해 한다. 비정상적 행동이 정상적 사고를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나 개운치 않다. 누군가가 말해야 한다는 고집스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주변 지인들도 같은 말이다. 혼자 나서봐야 나아질게 없다고 말한다. 하기야 그렇다. 모두 제자리에 바로서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건 남의 일에 절대 참견하지 말라고도 당부한다. 득보다 손해라는 인식이다.
어른이 어른의 역할을 접겠다는 것이다.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조에서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것이 어른 없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사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사람의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이 명제 앞에는 빈부도 유무식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좀 가졌다고 자만하고 모자란다고 낙담하지 않은 이유다.
나 역시 중요한 고비마다 수 없는 좌절의 쓴맛을 보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오로지 도전의 용기와 꼭 일어서고 말겠다는 자신과의 다짐은 오뚝이 인생을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운 경우에서도 불순물이 끼어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갈하고 순수한 그야말로 사람의 본디 마음만이 작동해야 한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려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위험한지 알면서도 불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기에 평소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다운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이 책의 주제인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불의가 아무리 판을 치고, 아프고 서러운 일들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더라도 인간의 근본인 도덕적 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인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인간답지 못한 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하늘에 닫도록 재물을 쌓아두고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들,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 국민의 원성을 사는 사람들, 하나같이 옳게 사는 법이 아니다.
비록 학문의 배움이 부족하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딸리더라도 남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고 주변의 칭송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옳은 삶이다.
인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때가 되면 소멸되는 한시적 운명체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굳이 남의 눈에 피눈물 나도록 하면서 나만 잘살겠다고 아귀다툼해야 할까? 그건 아니지 않는가? 누누이 말하지만 인간이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관계 대 관계다. 깊이 따져보면 나와 네가 따로 없다. 어차피 하나 되어 살아야할 숙명적 존재다. 우리는 이것을 잊고 산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의 가락은 잡히지 않는가? 비록 원론적이라도 말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인간의 기본 도리에서 고민하고 해답을 구현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또한 사람마다 다른 개성과 가치관을 가졌기에 원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인생에 있어 이 세상 어디에도 절대라는 단어는 없다. 운명은 언제나 가변성이다. 재력도 권력도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자만도 좌절도 부질없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이웃과 오순도순 나누며 살면 그것으로 잘사는 것이다. 비교하며 시기하고 사익에만 눈독 들이면 그것이 곧 불행이라는 것을 뼛속깊이 새겨야 한다. 똑 바른 나의 길만 걸어가면 만사가 형통이다. 그야말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32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30회를 올린 지 벌써 두 달이 지났군요.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한국촌’ 가는 길목을 붙잡았답니다. 싱가포르 생활에 관한 정보를 드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기분 좋은 한국소식을 전할 것도 마땅찮아 내 저서에 실린 일부분을 올리려고 합니다. 그저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 단 한 가지라도 참고가 되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입니다.
싱가포르는 나에게 엄청난 시련과 추억을 안겨준 곳입니다. 특히 ‘한국촌’은 너무 많은 인연을 맺어준 가교였기에 영영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누가 꼭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한사코 올려야할 의무도 없지만 그냥 문을 닫기가 왠지 서운하고 망설여집니다. 여러분들의 사는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이고요. 관심과 참여 부탁할게요.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행복한 맘님의 댓글

행복한 맘 (njy6822)

오래만에 올라온 글을 보고 넘 반가왔어요 ^^  댓글 거의 달지 안았지만 저처럼 님 글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너무 반갑습니다 좋은 말씀 잘 읽고 갑니다~~~

ccumbi님의 댓글

ccumbi (ccumbi)

참으로 닮고 싶은 어른이시네요...감화 감동의 글 감사드립니다.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행복한 맘님, 반갑습니다. 행복의 바이러스가 전염된 듯 기쁩니다. 저 글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으리라는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ccumbi님, 어쭙잖은 소견일 뿐인데 너무 과찬을 주셔서 외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입니다.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투썬즈님의 댓글

투썬즈 (jungsoowoo)

안녕하세요 넘 반갑습니다 잘 계시죠? 할머님은 좀 많이 괜찮아 지셨는지요?
선생님의 구구절절한 글은 읽을때 마다 감동입니다. 어르신들의 삶자체가 역사지요.
저도 사십중반이 되다보니 옛일들 재래식화장실등등 다 공감이 됩니다. 요즘애들은 이해를 못하겠죠?
인생의 반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뭔가 전환점내지는  나머지 생에 대한 새로운 도전 , 결정 이런 것이
필요한 시점인것 같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남과 같이하는 삶 , 혼자만 잘먹고 잘사는 삶이 아니라 남을위한
보람되고 소중한 일을 찾으며 살려고 노력해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투썬즈님, 반갑습니다. 집사람은 아직도 바깥 출입을 못하고 있어 힘듭니다. 좀 더 세월이 필요한가 봅니다. 받아보셨는지요? 로사리아는 바쁜 사람이어서... 꼭 챙겨보세요.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줄리앙님의 댓글

줄리앙 (kofather)

정성드려 쓰신글 또박 또박 정독해서 읽곤 합니다. 살아온 경험담을 너무 솔직하고 담백하게 쓰셔서 갑자기 숙연해지는군요. 건필 하십시오.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줄리앙님, 오랫만입니다. 이렇게라도 뵙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요.
늘 과찬하여 주셔서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에너지가 솟아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나그네되어님의 댓글

나그네되어 (ara285)

새벽에 일어나서 우연히 접하게 된 글.  다시금 허망하게 살아온 자신을 돌이켜 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님은 참으로 멋지십니다.
건녕을.......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

감사합니다.
나그네되어 님, 오늘 글을 올리다가 격려의 글을 보았습니다. 님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셔야 합니다.

훈이네님의 댓글

훈이네 (dany17)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가슴한귀퉁이 멍해지네요 제가살아온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것도깨우치게됩니다 감사합니다조금이나마 투명한 정신이되는말씀 잘 읽고 갑니다

훈이네님의 댓글

훈이네 (dany17)

남강서생님 저희 친정 아빠 연세시네요 아뺘뵈러 한국 가고픕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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