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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 사는 이야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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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강(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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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0-05-18

본문

        꽃과 인생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영산홍을 바라보며-

5월12일, 모처럼 화창한 봄 날씨다. 비오고 바람 불고 춥다가 덥고, 그렇게 변덕스런 날씨가 오늘따라 더없이 맑고 푸르다. 오늘의 드높은 자태를 뽐내기 위해 그토록 심술궂게 굴었는가보다.
하늘이 마음을 열었는데 어찌 그냥 집에 틀어박혀 있겠는가. 잠시 컴을 끄고 밖을 나섰다. 남강쉼터를 한 바퀴 돌았다. 울타리에는 넝쿨 장미가 한창 꽃망울을 맺고 있어 마음이 풍요롭다. 한데 영산홍은 시들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음을 안은 채 무심코 한 발짝씩 걷다가 부딪친 곳은 동대구역이다. 주중인데도 오가는 사람들은 붐볐다. 확성기에서는 열차의 출발과 도착 안내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열차는 갔다가도 또 제자리에 되돌아오는데 인생에 있어 세월은 어찌 가는 시간만 있는가.

싱가포르를 가기 전에만 해도 썰렁했던 동대구역 구내가 옷가지에서부터 각종 음식과 기념품 매장으로 북새통이다. 쉼 없이 오가는 여행객 틈새에 이미 눈의 초점을 잃고 주저앉은 노숙자들,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들, 남녀노소가 뒤섞인 역구내의 그림이야말로 인생의 단면을 바라보는 것 같다. 광장을 나서자 아름다운 꽃장식이 구내에서 베인 어두움의 한 구석일랑 금방 날려버린다. 붉고 노랗고 희고 파릇한 꽃과 꽃잎은 파란 하늘을 희롱하는 듯 오롯하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지체하다간 해마다 짧게만 느껴지는 봄의 마지막 정취를 놓칠 것 같다. 무작정 팔공산행 시내버스를 탔다. 무엇인가 얻을 것만 같은 예감도 들어 괜찮다. 산행차림의 중년 부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예전부터 그랬던 터라 새롭지는 않았지만 늙은이들이 적다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노인당이나 공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노인들이 생각나서다. “힘이 없을수록 움직거려야 한다. 정신이 흐려질수록 머리를 써야한다.” 이것이 나의 노인탈출법이다.

봉무동에 들어서자  미국 메인주 소재 사립학교인 ‘리 아카데미’의 국내 분교의 신축건물이 눈길을 끈다. 미국과 동일한 교과 과정과 미국 학력이 인정되는 이 학교는 오는 8월 23일 개교할 예정이다. 내 손자는 이 학교에 응시하려 하였지만 포기했다. 미국식 교육보다 싱가포르의 교육방식 더 낫다면서 오는 2012년에 개교할 싱가포르 국제학교 한국캠퍼스에 다니겠다는 것이다. 1년에 2,300달러라는 수업료의 부담도 만만찮게 여겼을 것이다.
푸른 산야의 정취에 흠뻑 빠져있는 사이 버스는 나를 내려주었다. 아무른 목적지도 없이  팔공산 정상만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그저 묵묵히 걸으면서 이 봄의 마지막 냄새를 마음껏 들이켰다. 폐부에 찌든 도심의 지저분한 찌꺼기가 단번에 날아가는 기분이다. 한결 상쾌했다.
가로수는 짙은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허리마다 연등 줄을 휘감은 채 늘어섰다. 대구에서는 가장 큰 사찰인 동화사가 가깝게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맺히고 몸도 나른해 오고 있었다. 역시 나이의 한계에 부딪친다싶어 바싹 용을 썼다.

제법 한참을 걸었을 때 길 건너 저편에 새빨간 영산홍이 손짓하고 있었다. 붉은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가슴 깊숙이 보듬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도 없다. 걸음을 재촉하여 다다르자 땀이 몸을 흥건히 적셨다. 땀을 식힐 겨를도 없이 덥석 안았다. 비록 별난 향기는 없어도 어떤 녀석은 엷은 치장으로 또 다른 녀석은 짙은 분홍빛으로 분단장한 영산홍은 음흉한 나그네의 속내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카메라 앵글을 이리저리 대어 보았다. 검푸른 소나무가 붉은 영산홍의 늪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발목이 묶어 섰다. 파란 하늘을 유희하던 뭉게구름도 잠시 쉬어가 듯 얼굴을 삐죽 내민다. 카메라 셔터는 놓칠 리가 없다. 연거푸 몇 장을 찍고 나서야 한 숨 돌렸다. 이렇게 바깥 영산홍을 카메라에 훔쳐 담아왔다.
불이 나게 컴퓨터에 올려놓고 “꽃과 소나무와 뭉게구름의 조화”라고 이름 붙였다.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날마다 옆에 두고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다. 아내는 나보다 더 욕심이 많은가보다.

이토록 자연은 변함없이 인간을 반기고 제 때 제 자리에서 반추하는데 인생은 왜 그 날을 되새김질 할 수 없는 것일까? 한 번 간 그 날은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묻혀만 가야하는 것인가. 나는 또 엉뚱한 사색에 잠긴다.
‘어버이 날’,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이 왔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덕담이다. 늘 입에 달고 하는 말이지만 고맙다. 손주들에게 늦게나마 어린이 날 선물로 현금을 쥐어주었다. 며느리로부터 받은 현금보다 적게 나가 흑자가 크다. 잠깐 왔다가 가야하는 우리 사회의 환경과 가족구조가 너무 서글프다. 예전의 우리 시절만 해도 대가족일수록 축복받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3대가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은 예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들 며느리 손주가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법도였다. 울타리속의 가족이라는 응집력으로 불만도 불평도 묻혔다. 부자유친이었고 고부의 갈등도, 세대 간의 격차도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소통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어서 그랬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고달픔도, 서운함도, 가족이라는 용광로에 녹여냈다. 늘 함께 마주보고 느끼는 감정의 교류가 그렇게 만들었다. 너무도 자연스레 말이다.

반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간 자식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을 나왔을 때 금화보화였다. 마른자리 진자리 가려 키웠다.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던 날 가슴 조였다. 행여 다칠세라 남에게 뒤질세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식들이 제들의 자식에게 그러는 것 보다 더 그랬을 것이다. 머리가 굵어가고 친구가 많아지고 여자 친구까지 생기면서 부모와의 대화는 단계적으로 줄어갔다. 직장생활을 하고, 장가들고, 자식들을 가지는 모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부모와의 거리감은 비례했다. 제들의 삶이 평온하든 불편하든 상관없이 그랬다. 그래서 말했던가. 품안에 자식이라고...
헤어진 며칠 뒤 며느리로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고맙다. ‘항상 잘 챙겨 드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시라’고 한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이래서 생겨났을 것이다.

완쾌되지 않은 시어머니가 마음에 걸리고 딸처럼 여기는 시아버지도 때때로 생각날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며느리와 아들의 전화는 보약이다. 전화 받는 빈도와 통화길이에 따라 즐거움은 배가한다. 전화 한 번 받으면 최소 1년은 젊어지고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통화량도 비례한다. 1분이면 한 달씩 수명이 연장되는 느낌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반대로 1주일 내내 전화가 오지 않으면 서운하다 못해 우울해 진다. 하지만 그 마음이야 금방 지나간다. 진작 큰일은 민물처럼 밀러드는 걱정과 불안이다. 하도 험한 세상이어서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듯 부모는 자식에 있어 그렇다. 세상 자식들이 노부모들의 이런 마음을 모를 리 없을 터이지만 전화 한 통화에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노인들이 가장 견뎌내기 힘든 문제가 외로움이라고 했다. OECD 국가 가운데 노인의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가 말해준다.    
젊은이들이 쉰에 접어들면 어슴푸레 느끼고, 예순이 되면 그럴듯하게 다가오고, 일흔이 되는 그 때는 “참 그렇구나.”하며 무릎을 친단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보낼 때 몸서리쳐지도록 울부짖었다. 며칠을 두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래도 그치지를 않았다. 왜 그토록 피눈물이 나왔을까?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존재감이 크면 클수록 아버지를 향한 원망만 컸다는 사실을 미처 깨달지 못했었다. 30년 동안 그랬다. 내 마음을 열고 단 1년도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대접하지 못했다. 잠시 잠깐씩 모셨다면 이게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아버지가 방종하여 아내와 자식들을 내팽개쳤다고만 여긴 속단은 영영 지울 수 없는 불효를 낳았다.
사람의 외형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평가한다는 그 자체가 잘 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군들 자식을 소홀히 여기겠는가? 자식은 부모를 미워할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지 못한다. 이 답을 얻는데 30년이 걸린 셈이다. 너무도 길고 아픈 세월을 보냈다. 평생을 두고 치유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부모치고 자식들의 생각을 촌음인들 놓치는 이는 없다. 자나 깨나 걱정이고 비는 마음이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한없이 빌고 또 비는 것이다. 비록 자식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더라도 부모는 그렇다.
나는 부모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고달프고 치열한 생존경쟁을 핑계로 외면했다. 풍족한 재산을 물러주지 못한 무능한 부모로 업신여겼다.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도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몰랐으니 이 얼마나 멍청한 이율배반인가. 내 아이가 나의 아버지를 대면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고 있다는 평범한 이치조차 놓치고 살았다. 어리석고 못나기 그지없었다. 그러고도 내 자식으로부터 아버지의 대접을 받으려고 하였다면 착각을 넘어 뻔뻔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누가 말했든가. “부모는 자식을 낳아준 것으로도 공경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재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재능이다.” 이 말을 알아차린 것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이 50을 넘어 섰을 때다. 더욱 절실히 다가온 것은 환갑을 맞고 일흔을 지난 지금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천치바보다. 나에게 스스로 살아가는 건강과 지혜를 주었고 일흔에도 식지 않는 열정을 주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 얼마나 크고 많은 유산인가. 돈으로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재산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나이에 어름푸시나마 깨우친 것은 사랑의 방법이다. 한없이 인자하면서도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매의 조화다.  
옛말에 “얼러 키운 자식 효자 없고 매로 키운 자식 불효 없다”고 하였다. 빈말이 아니라는데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매대기가 좋을까만 때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 매라면 회초리를 연상하지만 따끔한 꾸지람도 매서운 매다. 이것마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매인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을 가르치는 일이다. 특히 개인주의의 만능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부모형제의 소중함은커녕 기초질서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결국 그 피해자는 당사자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일깨워 줘야 한다. 어차피 사람은 혼자 살 수없는, 관계를 통한 사회성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철들자 늙은이가 되었다. 환갑진갑 지내야 철든다는 말이 실감난다. 만약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아버지를 천배 만 배 아픔 마음으로 보듬어 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세월이 야속하고 소중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꽃은 내년이면 또 필 것이다. 세월을 초월한다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이미 피고 진 그 꽃은 그것으로 생명을 다한다는 사실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다만 닮은꼴이 그 뒤를 이을 뿐이다. 꽃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이란 어떠하겠는가? 그 닮은꼴마저 없으니 더욱 덧없는 존재다. 그래서 삶의 무게가 더 큰 존재다.
‘사랑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때로는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하고 싶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세월의 흔적까지도...

                                                                                              <16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내일이면 시들어질 아름다운 꽃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5월이면 죄스러운 선친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내 나라 아름다운 산하의 조화를 싱가포르 교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진정으로 소통하는 “가정의 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4회에서 찾아주시고 추천과 댓글을 남겨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행복하게 님, 웃자 님, Tommy 님, 훌랄라 님, 화니 님, 투썬즈 님, 서쪽 님”께 다시 한 번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 가족과 하나 되는 뜻 깊은 5월로 새겨두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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