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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는 이야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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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강(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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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04
본문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가-
<동대구역 가까운 곳에 청솔아파트가 있다. 그 곳에 가면 길쭉하면서도 앙증맞은 쉼터가 똬리를 틀고 있다. 오다가다 쉬어갈 수 있는 팔각정이 있고 그 주변에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조금 더 있으면 넝쿨 장미가 붉은 피를 토해낼 것이다.
어언 6년이란 세월이 과거란 무덤에 묻혀버렸지만 그 때의 기록만은 살아 숨 쉬고 있다.>
며칠 전에 대구로 이사했다. 세입자가 갑작스럽게 이사하는 바람에 나 역시 허겁지겁 짐을 싸야 했다. 당장 요긴한 살림살이만 챙겨온다고 하였지만 풀어놓으면 예사롭지 않는 것이 이삿짐이다. 무엇보다 마음 상하고 애를 먹은 것은 세입자가 키우던 강아지의 배설물이었다. 거실의 쪽마루는 오줌으로 군데군데 상했고 냄새도 진동했다. 게다가 담배냄새까지 합류해서 머리가 아팠다. 아마 싱가포르의 집주인이었으면 난리가 나도 크게 났을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싱가포르에서의 집 없는 서러움을 생각하라’는 아내의 말에 무척 참느라 여간 힘들지 않았다. 도배를 하고 청소아줌마 두 명을 불러 구석구석 쓸고 닦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켜고 며칠 동안 창문은 모조리 열어놓고 지내고서야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다. 커튼설치를 끝내고 모처럼 티 테이블에 앉아 차 한 모금을 머금었다. 바깥을 내려다보자 6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하루 350여 편의 열차가 왕복하는 철도변의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한 것은 대구시가 민자 1조3천억 원을 유치해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사를 세계적인 비즈니스 타운으로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 때문이었다. 그 무렵 지금의 아파트가 분양 중이었다. 40평형이어서 규모도 괜찮고 내부설계도 마음에 들어 덜렁 계약을 했고 한 달 뒤인 2월에 입주했다. 그리고 아파트 운영회장을 떠맡았다. 관리규약도 만들고 장단기운영계획서도 작성했다. 아주 미세한 하자보수에도 심혈을 기우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한여름에 문제가 발견됐다. 2미터 높이의 철도 담장너머에서 파리와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쥐떼와 고양이가 득실거렸다. 악취까지 풍겨 깜짝 놀랐다.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와 철도경계담장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뾰쪽한 수가 없었다. 일단 동대구역에 연락하여 청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자기들이 오히려 인근 주민들에게 요구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주민들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행위로 인해 철도주변이 불결해졌다는 반론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주장을 시인하는 꼴이 되어 혹 때려다 외려 붙이게 되었다. ‘담장 아래는 주차장이다시피 외지인의 왕래가 빈번하다. 바람에 날아드는 쓰레기도 많다. 무엇보다 철도변에 우거진 수풀로 인해 해충이 생기고 설치류의 서식처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주민들에게 떠넘긴다면 그 증거를 대라’고 맞섰다. 논쟁이 오가다 결국 그들이 손을 들었다. 청소인부 10여명이 동원되어 수풀도 베고 쓰레기도 치었다. 담장 밖으로 나오는 폐기물에 놀라고 염치없었다. 침대 매트리스에다 부서진 가구, 후라이팬까지 생활폐기물이 수두룩했다. 음식물 비닐봉지는 겹겹이 쌓여 나왔다.
애써 외면하고 부인하고 싶은 실종된 시민의식에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는가. 청소인부에게 간식을 대접했다. 죄송스런 마음에서 더욱 그랬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묘수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나날이 고민은 깊어갔다. 창가를 맴돌며 서성거리던 어느 날, 뇌리를 스치는 힌트가 컴퓨터 앞에 앉혔다. 철도청과 대구시를 검색했다. 철도부지도 위치와 용도에 따라 매매된다는 사실과 대구시는 자투리땅을 이용한 소공원조성사업을 한다는 정보를 얻은 것이다.
나는 무릎을 치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 때가 2004년 9월이다. 타이틀은 “철도피해대책위원회, 푸른 동산 만들기 모임”으로 정하고 향후 계획서를 짰다. 이어서 주변 아파트와 빌라 주민대표 14명을 우리 집에 모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철도 땅을 사들여 공원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모두 의아한 눈초리로 주목했다. 일장 연설을 했다.
- ‘지난 번 대청소를 하였지만 근본대책은 아니다. 쾌적한 환경개선을 위해서는 공원을 만들어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관할 수는 없다. 도전하려고 한다. 다만 여러 분들은 진정서에 서명날인만 해주면 그 다음의 모든 일은 나 혼자서 하겠다. 어떤 명목의 경비부담도 지우지 않겠다.’-
박수를 치면서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과연 성사 가능한 구상인지? 지방의회에 진출할 포석은 아닌지?’ 등등 의심스런 말도 튀어나왔다. 개의치 않고 미리 준비한 진정서를 나누어 주었다. 철도청, 철도시설공단, 동구청에 보낼 세 통이었다. 만약에 대비하여 여분을 더 받아두기로 했다. 대표자는 물론 내 명의다. 그러나 진정서에 주민들의 서명만 받는데도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동 대표가 받아오지 못한 세대는 내가 가가호호 다니며 받아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느 동 대표는 실현가능성이 없다며 끝내 사양하여 포기하기도 했다.
철도부지 관할지은 철도시설공단영남본부와 부산지방철도청이었다. 새마을호에 오를 때의 각오는 비장했다. 꼭 얻어 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다. 사실은 내가 스스로 짊어진 무모한 도전이었다. 먼저 부산역 인근의 한진해운건물에 있는 철도시설공단부터 들렸다. 재산관리부서의 담당자를 만났다. 용무를 설명하고 미리 준비한 지적도와 사진을 내보였다. 커다란 지도와 서류를 꺼내놓고 한참 보더니만 ‘시설자산’이어서 매도불가라고 했다. 한순간 힘이 빠졌다. 그러나 부지의 반쪽은 철도청 땅이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대의명분이 분명한 일이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달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물러섰다. 청사를 나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철도청에서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두렵기도 했다. 부산역사에 있는 부산지방철도청에 갔다. 이곳 역시 ‘철도운용자산’으로 묶여 있어 팔 수 없는 지대라는 대답이다. 다만 방음벽설치는 고려해 보겠다고 했다. 눈앞이 아찔했다. 괜한 발상으로 망신살만 산 것 같아 되돌아서는 발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심정은 착잡했다. 열차마저 빨랐다. 어두운 얼굴을 본 아내는 실패한 나들이를 직감하고 그냥 접으라고 권유했다. 그래도 한 가닥 남은 희망은 관할구청이었다. 다음날 구청 재산관련부서 팀장을 만났다. 결연한 의지로 ‘꼭 공원을 만들어야 된다고...’역설했다. 무척 난감한 표정을 짓든 담당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철도청에서 매매가 안 된다면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고 설령 팔 수 있다 해도 사들일 예산이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순간 더디어 여기서 끝이라는 생각에 당돌했던 자신에게 매질을 해야 했다. 잘 알겠다는 코멘트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 길로 구청장실을 노크했다. 비서실장은 구청장이 부재중인데다 미리 면담일정을 잡아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야기다. 날짜가 잡히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돌아선지 보름이 지나도 기척도 없었다. 화가 치밀어 구청 홈페이지에 있는 구청장과의 면담 코너에 항의의 글을 올렸다. 인터넷의 효과는 빨랐다. 그 날 오후 3시에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나였다. 우선 함께 나갈 사람이 없었다. 달랑 혼자 가기에는 설득력도 떨어지고 모양새도 초라하게 느껴져서다. 몇 군데 연락을 하였지만 동행자는 찾지 못했다. 급한 나머지 아파트 관리소장과 집사람을 주민대표로 위장시켜 대동할 수밖에 없는 쇼를 연출했다. 지금은 웃음거리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그 때는 정말 절박했었다. 구청장은 40대 중반의 뜸직한 인상이었다. 공원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두고 열변을 토했다. 고개를 끄덕이든 구청장은 담당팀장을 불렸다. 아까 만난 그 사람이다. 타당성이 있는 민원이니까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에게 실무자와 잘 상의하라며 격려했다.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정쩡하게 물러난 기분이어서 문서로서 대못을 박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진정서를 들고 또 찾았다. 제출하기 전에 먼저 팀장에게 보였더니, 진정서가 접수되면 가부간의 결정을 지어야 하니까 이런 문제는 퇴로가 없어진다며 만류했다. 그러면서 철도청에다가 아예 공원을 만들어 달라고 쌔게 밀어붙혀보라고 귀띔했다. 하기는 그렇다. 명분은 고속철도 대구구간의 지상화 결정에 따른 소음과 분진에 대한 피해 대책이니까 맞는 말이다. 당초의 부지 매도에서 공원조성 쪽으로 가닥을 새로 잡았다. 한 달 간의 숨 가픈 레이스를 끝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다시 진정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 해 10월 말경이다.
진정서의 요지는 이렇다. 당초 철도인근 주민들이 원했던 고속철도 지하화가 예산문제로 지상화로 결정됨으로서 발생할 소음피해와 쓰레기장이 될 수밖에 없는 입지를 서두에 깔았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철도부지는 철도면의 10여 미터 높이에 위치한 휴면용지어서 사실상 철도용지로 활용할 가치가 없어 보인다는 의견을 자세히 설명했다. 결론은 콘크리트 담장을 허물고 소공원을 조성함으로서 쓰레기 청소로 인한 예산낭비와 주민들과의 마찰차단은 물론 철도변정비까지 성취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정서를 발송하면서 우리 선거구 국회의원에게도 협조요청을 했다.
흔쾌히 화답할 수 있는 명분이라고 여겼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한두 달 만에 돌아오는 회신은 언제나 ‘검토 중’이거나 ‘불가’였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에게 구시렁거렸다.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사서 하느냐.’고 말이다.
능통성도 창의력도 없는 경직된 공직자들의 업무수행 태도 역시 질타와 불평의 대상이었다. 어느 정도 기대했던 국회의원은 아예 소식조차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당시 건설교통부장관에게 탄원서를 발송했다. 회신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여기까지 무려 2년이 걸렸고 십 수통의 진정서와 항의서 사본이 쌓였었다.
현장조사가 시작되고 실무자들의 타당성 의견이 상부에 올라가기까지의 마음고생은 어찌 말과 글로서 다 표현하겠는가. 먼저 승인이 난 곳은 철도청으로서 구청과 협의해서 무상임대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바뀌면서 이마저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도청으로부터 인수받은 바가 없다는 게 ’안 된다.‘는 불가사유였다. 기가 찼다. 이제 남은 것은 발악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우롱하는 처사라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렇게 또 몇 달이 흘렸다. 당시 이철 사장에게 장문의 탄원서를 썼다. 그렇게 3년만에 얻어낸 땅이 지금의 ’남강쉼터‘다. 철도공사의 무상임대 결정이 나자 시설공단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2007년 2월이었다. 동구청의 차례가 되었다. 역시 예산타령이다. ‘땅은 얻어왔으니 공원조성은 해줘야 할 것 아닌가.’라는데 토를 달지는 못했다. 그저 지독한 사람을 만났다는 쑥덕공론만 무성했다. 하거나 말거나 나는 구청장과 단판을 했다. 구청장의 1년판공비를 거의 출연하고 나머지는 시청의 지원을 받기로 합의했다. 더디어 3월 쉼터공사가 착공되었다. 제주(祭主)가 되어 고사를 지냈다. 평소에 못 먹는 술이었지만 이 날 마신 제주(祭酒) 막걸리는 너무도 상큼하고 달콤했다. 시청 녹지계장의 첫마디는 ‘집값 올라가겠다.’였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주민들도 입을 열었다. ‘무에서 유를 얻어낸 우리 회장‘이라고...
더디어 4월20일, 나의 호 ‘남강’으로 쉼터 이름이 지어지고 구청장과 유지 그리고 주민들이 참석한 ‘남강쉼터’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참으로 남모를 고통과 좌절을 통해 일궈낸 내 나름의 큰일이었다.
칠십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 같은 발상을 하였다는데 대해 스스로 크게 고무되기도 했던 그 해였다.
어제 낮 창가에 앉았다가 얼른 일어나 쉼터에 달려갔다. 만발한 영산홍은 주인을 반기듯 알듯 모를 듯 야릇한 향기로 반겼다. 팔각정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때로는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한단다. 투시담장에 찰싹 달아 붙은 덩굴장미는 한창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다. 쉼터 곳곳에 서있는 운동기구에 처음으로 올라보았다. 당장 아내와 운동기구를 탈 수 없다는데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만나는 사람마다 ‘회장님의 덕분으로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인사말에 가슴 뿌듯한 보람을 안는다.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5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제자랑 같아서 망설였으나 당시의 감회에 못 이겨 쓰게 되었습니다.
지난 편에서도 성원하여 주신 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늘 댓글로서 용기를 주시는 투썬즈 님, ROSALIA 님, 웃자 님,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댓글목록
행복하게님의 댓글
행복하게 (raindeer)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사시네요. 저도 열심히 산다고는 하지만, 그냥 제 주위의 일을 챙기기에만도 벅찬데 말입니다. 늘 건강하세요.
웃자님의 댓글
웃자 (emsabina825)이사하셨군요... 건강은 괜찮으시지요? 선생님 글 읽게 될때마다 대단하신분이란 생각을 합니다.... 자꾸 친정 아버지 생각이 나구요..... 언제나 등대처럼 어둠속의 밝은 빛을 비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ommy님의 댓글
Tommy (pmaker)저마다 실익만을 찾는 곳에서, 정말 쉼터와도 같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훌랄라님의 댓글
훌랄라 (hgh987)저도 뭔가를 위해 열심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생기네요. 건강하시지요?
화니님의 댓글
화니 (jxkk)대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이글을 읽고 있습니다. 오후에 한번 가서 남강 선생님의 업적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투썬즈님의 댓글
투썬즈 (jungsoowoo)열 네 번째 글이 잠시 사라 졌었어요 무슨일일까 놀랐었는데 다시 올라왔네요.^ ^ 누군가가 하겠지 하며 항상 뒷짐만 쥐고 구경만 하는 저 같은 입장에서는 님의 용기와 열정, 수고하심에 박수를 보낼 따름입니다. 늘 코멘트 단 분들께도 아이디까지 일일이 나열해 가며 감사를 표하시는 님께 되려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서쪽님의 댓글
서쪽 (jdkj2)대구를 가게 되면 그 쉼터를 꼭 한번 들러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남강(서생)님의 댓글
남강(서생) (h12k13)과찬의 말씀을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혹여 '남강쉼터'를 보고 싶으시다면 쪽지 또는 메일(hgjung77@naver.com)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안내해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오순도순 나누고 싶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랑이 심했나 싶어 면구스럽기도 하고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