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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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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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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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회초리-

대중식당에서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네 댓살 먹어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이 맞붙었다.
서로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을 해대며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얼굴은 홍당무다.  고막이 찢어질 듯 대성통곡을 했다. 서로 절대 질 수 없다는 악다구니다.
밥을 먹던 사람들도, 차례를 기다리며 담소하던 사람들도 아이들에게 시선이 몰려 있었다.
네 살쯤 되었을까? 키 큰 남자 아이가 장난감 골프공을 가슴팍에 꼭 움켜쥐고 같은 또래 남자 아이를 밀어내고 있었다.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공방전이다. 양보할 기세는 한 치도 없어 보인다. 힘 겨누기와 고함질만 있을 뿐이다.
공을 가진 남자 아이의 누이동생도 오빠 옆에 착 달라붙어 가세했다.
아이들의 싸움은 순간적이었지만 2라운드가 문제였다. 그 불똥이 어른들로 옮겨 붙은 것이다.
네 아이 탓이 시작된 것이다.
발단은 작은 공이었다.
키 작은 남자 아이의 공을 오누이가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져간 그 아이가 자기 것이라며 돌려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주객이 뒤바뀐 상황이다.
그런데 말이다.
체격이 왜소한 남자 아이의 아빠엄마는 아들에게 ‘더 좋은 것 사 줄게, 그냥 가자’라며 달랜다.
한데 오누이 아이의 아빠는 소위 깍두기 머리에 체격도 헤비급이다. ‘야 내버려, 던져버리라니까’라며 자기 아이를 감싼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분을 삼키다 못한 남자 아이의 엄마가 오누이를 향해 ‘그게 네 것이냐? 남의 것을 뺏으면 뭣이 되는지 알기나 하나?’
이 말에 오누이 아빠가 발끈했다. ‘뭐라고?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강도짓이라도 하였다는 것이냐?’ 멱살이라도 잡을 태세다. 남자 아이의 아빠가 부인을 떠밀고 나가는 바람에 험한 꼴은 면하게 되었다.  
누구 한 사람도 나서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는커녕 입도 벙긋 못한다. 안한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를 일이다.
남의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벙어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본전도 못 찾을 것이 너무도 빤하다고 여겼을 게다. 나도 그랬다.
마지막 3라운드가 서글프다.
자기 공을 빼앗긴 남자아이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보듬고  나섰다. 밥상을 보아하니 밥을 먹다말고 가는 모양새다.
굴러온 공을 자기 것인 양 끝까지 버틴 오누이 아이 부부도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뺏든지 구슬리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에게 돌려줄 엄두도 내지 않는 모습이 괘씸스러웠다. 우는 아이 달래기에만 정성을 쏟고 있어 보는 이들을 민망케 했다.  
식당 분위기를 엉망으로 망가뜨린 아이들의 공 싸움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이야기는 지난 여름방학 때 우리나라 어느 식당에서 보았던 서글픈 기억이다.  

또 열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꼬마 녀석들이 달리는 열차 복도에서 뛰어 노는 모습이다. 흔들리는 열차가 제들의 놀이터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손뼉을 치며 깔깔댄다. 천진한 몸짓에서 귀엽고 우습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은 곱지 않다. 아이 엄마에게 시선이 간다.
이런 경우 엄마의 반응은 서너 가지다. “아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도 이해 못하나?” 두 번째는 아이들을 붙들어 “가만 못 있어”라며 연신 아이 엉덩이를 때리는 형이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몹시 난감해 하는 엄마도 있다.  
결론은 이들 모두 아이들의 가정교육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 공중도덕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면 아이들 스스로 자제하는 내공이 쌓였을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될 도덕관념에 구멍이 뚫린 탓이다. 원인은 한마디로 우리 아이들을 기죽이며 키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디에서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버릇없는 아이,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에 나타난 사례의 엄마들은 기죽이지 않고 당당하게 키우는 올바른 법을 모르는 것이다. 자녀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언행과 몸가짐에 대한 기본 교육을 외면한 결과다.
미운 네 살이라고 할 정도로 엄마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나이가 네 댓살이다. 초기 교육에 있어 이때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동심리와 교육자들의 말이다. 인격형성기라는 것이다. 잘잘못의 인식을 분명히 심어줘야 한다. 때로는 매를 드는 일이 있어도 그것이 진정 아이들을 사랑하는 길이라면 흔쾌히 가야 한다. 사람의 길이기에 그렇다.  

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동네 뒤편의 펑퍼짐한 야산에 뫼 두기가 있었다. 언제랄 것도 없이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였다.  
해거름 때면 초등학교 1~2학년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모여들고 대 여섯 명이 엉켜 공차기를 했다. 봄에서 가을까지 아이들이 뒹굴다보니 뫼가 성할 리 없다. 봉분이 뭉개지고 주변의 잔디도 점차 누른 속살을 드러낸다.
그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은 어른의 회초리다. 누구 집이 먼저랄 것도 없다. 아이들이 아빠 엄마의 회초리를 맞고 싸리문밖에 쫓겨났다. 서로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대나무 껍질로 만든 굴렁쇠 놀이도 한 몫 했다. 덩치 큰 아이가 작은 아이 것을 뺏어 굴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누군가가 울었다가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버드나무 회초리다. 뺏은 아이는 말 할 것도 없고 빼앗긴 아이도 무사하지 못했다. 뺏은 쪽 엄마가 회초리를 드는 이유는 왜 남의 것을 빼앗아 울리게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반대로 빼앗긴 아이 엄마는 남자 녀석이 그만한 일로 울고불고 하느냐는 것이다. 전자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 따위 일로 남자 녀석이 우느냐며 대범한 사람이 되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있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내 것 네 것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다.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는데 까지 생각이 미칠 리가 없는 나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응징은 철저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믿었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라고 여겼다.  
이미 60년도 더 지나간 케케묵은 옛 이야기 같지만 오늘을 사는 엄마 아빠들은 곱씹어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의 인격형성은 나이 네 살 때부터라고 한다. 옛 어른들의 ‘세 살 버릇’이란 말이 예사롭지 않는 이유다. 그름에 대한 이해를 도와줘야 하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어야 한다. 잘 한 일에는 아낌없는 칭찬을 해줘야 하고 잘 못에 대해서는 따끔한 응징이 따라야 한다. 물론 무엇이 어때서 잘 못이며 그 잘 못의 결과는 어떤 것인지 충분히 납득시키는 설명이 전제돼야 한다.

엄마의 회초리,              
21세기의 인권지상주의에서 입에 담을 소리인가?
하지만 그 때 그렇게 자랐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웬일일까?
올해 50,000원권 우리나라 최고액지폐가 나왔다. 지폐의 앞면에는 신사임당의 초상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어질고 지혜로운 어머니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신사임당은 아들 이이가 학문의 깊음을 자만했다는 이유로 회초리를 들었다. 대나무 회초리로 이이의 종아리를 때렸는데 그 피가 묻어 대나무가 검게 자랐다는 뜻의 오죽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사임당은 회초리를 비단에서 꺼내 아들을 때리고 다시 비단에 싸 집어넣었다고 한다.  아들을 바로 키우는 보배와 같은 물건이라고 여겨 아무 곳에나 하찮게 보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이 율곡을 조선 최고의 선비로 키운 신사임당의 일화는 너무도 많다.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대신 자기의 종아리를 아들로 하여금 때리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아픈 마음으로 넘쳐흐르는 대목이다.
이 시대까지 현모양처로 추앙받고 있는 신사임당은 어머니로서는 남다른 사랑으로 어질었던 반면 교육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였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맹모삼천지교도 그랬고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찌도 회초리는 아이의 그릇된 행동을 교정하고 잘못한 자기 행동에 대한 자기 보상이라고 했다.

엄마의 회초리는 옛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의 이야기가 있다. 장애를 극복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는 엄마 우갑선의 헌신적인 사랑과 엄격한 매가 있었다는 것이다.
엄한 부모 밑에 못난 자식 없다는 속담이 실감나는 이유다.
봉건적 냄새가 물신거리는 낡은 사고의 산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가정교육이 무너진 사회는 병들게 마련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는 곧 자신과 이웃 그리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자리 잡게 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나눔의 덕성과 남의 아픔과 부족함을 끌어안고 채워주는 배려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 엄마의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아이들이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지름길이라는 이야기다. 이 속담의 현재적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21세기 인류 사회를 이끌 핵심적인 가치관의 기본은 부모의 참된 가치관을 통한 올바른 자녀교육으로 모두가 명문가가 될 것을 제안한다.
사랑하는 자녀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받고 사회생활의 모범이 되는 것은 오로지 엄마의 손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할 줄은 알아도 사랑받는 자녀를 키우는 법은 놓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요즘 한국의 청소년 관련 뉴스는 어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미래를 어둡게 한다.
중고등학생들, 심지어 초등학생 폭력조직까지 등장하였다고 한다. 왕따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선생님의 머리채를 잡고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도 있단다. 이쯤 되면 이유가 없다. 선생님의 잘못도 있다는 말은 성립 자체가 안 된다. 평소 가정교육이 옳게 된 아이라면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중생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술을 먹고 몸을 가누지 못해 추락사 하였다고 한다. 그제는 13살, 15살짜리 여자아이 두 명이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를 신고하였다는 이유로 친구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는 뉴스다.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그것이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일어 킬 수 있는 별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의 일이다. 더 이상 남의 일로 치부하며 방관할 수 없다. 기러기 엄마도 예외일 수 없다. 자녀교육이기 때문이다.
굳이 소수의 어두운 면을 크게 부각시키는 이유는 다시 한 번 우리를 뒤돌아보고자 하는데 있다.    

드리는 말씀 :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저의 짧은 소견에 불과 합니다. 나이가 드니까 걱정이 많아집니다. 여러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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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캔디님의 댓글

캔디 (mieco)

고마운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훈육에 흔들렸던 맘 정답처럼 꽉 잡아 주셨습니다~^^많은 가르침 받고 갑니다~내일도 좋은 하루 되세요`*^^*

긍정의힘님의 댓글

긍정의힘 (iandp)

서생님 고민했던 애들교육에 어떻게 시켜야 할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랜 내공에서 우러나시는 경험과 아쉬운점등 인생과 교육에 관한 많은 지침과 가르침관련한 좋은 글 많이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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