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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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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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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할아비가 되던 날- (2)

엄격히 구분하면 작년 11월부터 두 달간은 홀아비였고 기러기 할아비가 된 것은 올 1월부터다.
아무리 힘들어도 손녀손자 둘이 있을 때는 마음 한 곳이 놓였었는데 이제 한 녀석밖에 없으니까 이 또한 짝 잃은 기러기다. 착잡했다.  
손자는 쓸쓸한 표정을 애써 피했지만 누나와 헤어진 1주일 동안은 동요하는 눈치가 역력 했다. 그 모습을 바라봐야만 하는 내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너무 안쓰러워 손자의 얼굴을 보기조차 민망했다. 마치 내가 저지른 죄 같다. 이렇게 손자와 할아비의 생활은 시작 됐다.

손자는 잠을 많이 자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침 6시를 전후하여 스스로 일어났다.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잠이 많은 시기다. 그런데도 일찍 일어나는 것은 불안감으로 인한 신경과민일 것이다.
“아침밥을 먹어야 몸이 튼튼하고 몸이 튼튼해야 마음도 건강한 거야. 그러니까 아침밥을 먹어야 한다. 하루 밥 세끼를 먹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란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고 꾀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저 싫다는 것이다. 사실 먹기 싫어 먹지 않을 뿐인데도 할아비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이 마음을 손자가 알리 만무다.

여느 때처럼 손자의 안경은 어제 밤에 닦아 두었다. 교복과 양말도 챙겨 내놨다. 날마다 주는 2달러도 지갑에 넣어두었다. 신발만 신으면 등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세수와 양치질을 싫어한다. 아침마다 성화를 하고 재촉해도 싫단다. 양치질은 하루 한 번이고 세안은 샤워로 끝났다.  
어쩌다 아주 특별한 날도 있다. 아침식사로 계란 후라이나 시리얼과 우유를 먹고 양치질까지 하는 날이면 그렇게 내 마음이 훈훈할 수가 없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손자는 계란 후라이를 먹고 문 앞에 섰다. 하얀 운동화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양발과 마찬가지로 운동화도 내가 신기어주었다. 손자는 발만 내밀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남으로부터 돈 받고 하는 뒷바라지라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이렇게 기분 좋게 할 수 있을까?

손자의 등굣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부터 시작된다. 책가방도 내가 끌고 나간다. 빛바랜 둥근달은 이른 아침의 서녘에 걸려있다. 동틀 무렵의 공기가 상쾌하다. 띄엄띄엄 나타나는 학생들이 시선을 붙든다. 뚱뚱한 엄마가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는 곡예 같은 볼거리도 있고, 히잡을 두른 엄마가 아들딸과 손잡고 가는 그림도 좋다, 아빠가 딸의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정스레 걷는 모습도 있지만 할아비와 손자가 함께 등교하는 케이스는 우리뿐이다.
손자의 딱 벌어진 어깨와 오동통한 종아리가 듬직하다. “야~, 똥강아지야 같이 가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듯 아주 상스런 부름도 손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었다. 손자가 너무 귀여워 쓰는 할아비만의 애칭인줄 아는 것이다. 가끔은 싫다고도 한다. 똥강아지가 크면 똥개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 사이는 유별나게 정겹다.
하기야 6개월 때부터 똥오줌 받아내며 키웠던 남다른 관계에서 연유된 것이렷다.

학교 뒷문이 있어 정문까지 가는 거리가 3분은 단축되었다. 아침마다 만나는 경비원은 낯이 익어 굿모닝을 주고받는 사이다. 인사말은 어느 사회에서든 즐거움을 나누는데 있어 가장 값싸고 순수한 교류다.
‘배고프기 전에 미리 사먹고 계단 조심해라.’ 날마다 손자에게 반복하는 당부다. 손자는 학교 문을 들어서서 서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세 번 쯤 손을 흔든다. 1시 40분에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하고 되돌아선다. 그래도 손자가 들어간 학교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의 아침 풍경은 역시 부모자녀들의 동반등교가 거의 전부다. 사랑이 영그는 행복의 시간들이다.

그 다음 코스는 놀이터에 마련된 운동기구 활용이다. 내가 이곳 아파트에 이사 왔을 때 만족했던 두 번째 매력이다. 몸통 좌우 흔들기, 허리 돌리기, 팔 돌리기, 몸통 돌리기, 걷기 운동 등등 거의 모두 우리 나이에 딱 맞는 운동기구들이다. 여덟 개의 기구를 100번씩 이용하면 30분이 걸린다. 의사들이 권유하는 매일 30분씩 주 5일 간 운동량이 충족되는 프로그램일 것 같아 만족스럽다. 또 하나 좋은 것은 아침 7시를 전후한 시각엔 놀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부담 없이 혼자 30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매력이다.
걷기 운동을 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지만 내키지 않았다. 콘도에서 살 때는 아내와 함께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운동이 좋았지만 지금은 싫은 것이다. 혼자 걷기가 왠지 초라하게  느껴져서다.

샤워를 하고 TV를 켜면 KBS 아침마당이 진행되고 있어 눈요기가 된다. 아침밥을 한 술 뜨고 곧 아내와 통화한다. 첫 번째 말은 아내의 컨디션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항상 손자다.
LG 070의 인터넷 전화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한국 집에도 한 대, 아들과 며느리의 사무실에도 각각 한 대씩 싱가포르까지 4대다. 지난 해 모두 내가 마련해 준 것이다. 그리고 3년 전에 아들이 쓰고 있는 월정액의 국제전화까지 이용되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나 통화는 가능하다. 참 좋은 세상이다. 40년 전만 해도 가정집에 전화 놓기도 힘들었다. 괜찮은 직장 덕분으로 전화를 놓았을 때 부러움을 받았던 추억이 새롭다.  

다음 차례는 인터넷 신문 보기다. 커피 한 잔을 먹는 시간이기도 하다. 연합뉴스,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순이다. 객관적 판단을 위해서 중립과 보수, 진보로 대표되는 매체를 고루 보는 편이다. 거의 제목만 훑어보다가 주요 기사다 싶으면 꼼꼼히 살펴본다.
가끔씩 토론장에 의견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적극적인 개입은 자제한다. 2년 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하였다가 피를 본 경험이 정치를 환멸의 대상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할 수도 없는 것이 정치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어 그렇다.

  컴퓨터 앞에서 기지개를 켜고 나면 청소다. 청소기와 밀대가 힘을 덜어준다. 아파트 규모가 작아 30분이면 끝난다. 이집의 매력 포인트 하나는 청소기와 냉장고, TV가 삼성 제품이다. 집 얻으려고 왔을 때 우리나라 제품이 여럿 있어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갔다.
이렇게 하다 보면 11시다. KBS 정오 뉴스를 들으면서 점심 반찬을 생각한다. 날마다 찬이  달라야 성에 찬다. 같은 찬을 또 올리기가 싫은 것이다. 이미 정해진 메뉴가 있지만 ‘무엇을 만들어 줘야 손자의 식성을 만족시킬까’ 하는 생각은 언제나 고민거리다.

1시40분에 수업이 끝나기 때문에 1시30분에 집을 나선다. 뙤약볕을 피해 아파트의 셸터(shelter=지붕 있는 통행로)를 이용한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육교다. 처음 20계단을 올라가면 다음 20계단이 기다린다. 40계단이다. 양쪽 계단을 합하면 80계단인데 하루 두 번씩 오르내리니까 320계단을 밟는다는 계산이 성립된다. 제법 많은 운동량이기도 하다.
1950년 6.25사변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실향민들이 즐겨 불렸던 ‘경상도 아가씨’를 떠 올리게 한다.
부산 중앙동에 <사십계단 기념비>까지 세워진 ‘경상도 아가씨’는 가수 박재홍씨가 불러 인기를 누렸다. 나도 제법 많이 불렸던 노래다. 그 가사의 첫 소절에 ‘사십계단’이 나온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6.25의 아픔이었다. 어릴 적 우리 연배들이 철없이 불렸던 노래다.

학교 문 앞에 있는 아파트의 둥근 의자를 중심으로 아이들 마중 나온 젊은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여기도 인종 전시장이다. 비록 얼굴색도 몸집도 각양각색이지만 자녀를 향한 ‘사랑’은 하나같을 것이다. 수업 종료 차임벨이 울리면 초등학생 꼬마들은 자기 몸집보다도 더 큰 책가방을 메거나 끌고 교문 밖을 나선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엄마와 아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반가움이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손자가 싱글벙글 미소를 머금고 나온다. 손을 흔들며 손자를 맞고 책가방을 넘겨받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진다. 나는 어쩌면 손자와의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좋아서 손자의 등.하굣길을 놓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언제 보고 들어도 기분 좋은 얼굴이고 이야기다.  

손자가 점심을 맛있게 먹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다. 이국땅에서 늙은 기러기로 사는 가장 큰 보람이자 희열이다. 후식을 먹고 컴퓨터 게임이 끝나는 오후 4시에서 5시면 영어 또는 중국어 투션(tuition)이 시작된다. 지금 우리는 월. 수에 영어를, 화. 목요일에는 중국어를 하고 있다. 1시간 30분씩이다. 개인지도 전업선생님들로서 투션비는 하루 35달러다. 학생가정교사들은 교습비가 좀 싸지만 시간이 들쭉날쭉하여 오래전부터 이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습방법도 프로와 아마추어는 확연히 다르다. 재미있게 웃으며 가르치는 것과 딱딱한 분위기에서 가르치는 차이는 또렷하다. 나는 특히 한국 에이전트에게 부탁하여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나의 팬이기도 하여 너무 기분 좋았다.

손자가 한 숨 돌리고 나면 저녁밥을 먹는다. 투션 시간에 미리 준비하여 두어서 언제라도 먹을 수 있다. 생선은 뼈를 발라내어 숟갈에 얹어준다. 내가 클 때만 해도 젊은 아빠 엄마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이다. 아이들 버릇 나쁘게 키운다는 어른의 꾸중이 두려워서다.  
어른의 위치에 있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고 버릇없는 아이가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집안에서나 짐짓해보는 어리광일 뿐이다. 손자는 인사성 밝고 남에게 대한 양보심도 대단하다. 낯간지러운 행동은 하지 못한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사람의 품성은 선천성과 후천성이 있다고 한다.  
저녁상을 밀치고 나면 다음 차례는 숙제 풀기와 책읽기다. 시간이 나면 컴퓨터 게임으로 밤잠을 재촉한다.
하루의 종지부는 아빠 엄마 그리고 누나와의 통화다. 누나가 학원에서 돌아오는 9시10분은 어김없다. 10여 분간의 대화는 얼마나 진지하고 다정한지!. 누나와의 대화를 끝으로 하루는 마감된다.  

손자가 잠들 때까지 팔베개 해주며 오늘 손자와의 하루를 바둑판 복기하듯 되풀이 한다. 잘 한 일은 칭찬하고 부족했던 일은 어떻게 고쳐야 좋은 사람이 된다고 일러주는 일이다. 때로는 할아비의 옛 이야기도 들러준다. 참 재미있어 하고 호기심도 발동한다.
어떻게 하든 손자가 외로워하거나 잡념을 가지지 못하도록 무진 애를 쓴다.
아이에게 정신적 지주로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심신의 건강을 함께 챙기는 노력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손자는 목요일마다 CCA에 참가한다. 4시15분에 끝나기 때문에 매일 가져가는 용돈 2$에 점심값으로 2$을 더 얹어 준다. 손자는 때때로 학교 용돈을 아껴 쓰고 남은 돈은 저금통에 넣는다. 그렇게 모아진 돈이 지난해는 52$이었다.  
내일은 손자가 가장 고대하는 Lecky Day 금요일이다. 손자가 지어낸 소위 황금요일인 것이다. 왜 금요일이 그렇게 좋은지 물었더니 첫째 이유는 일주일이 갔다는 것과 두 번째는 늦게 잠자리에 들어도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음날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어 더욱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토요일이면 베독 도서관에 나가 책을 빌러온다. 바깥바람을 쉘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서 너 달 전까지만 해도 수요일에도 나갔는데 지금은 토요일만 나다닌다. 빌려볼만한 책이 없다는 핑계다. 이렇듯 금요일은 손자에게 있어 해방감을 만끽하는 날이다.

오늘 낯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린다. 샌들과 우산을 챙겨 나섰다. 비오는  날이면 학부모들도 교정까지 들어 갈 수 있었다. 손자 운동화를 벗기고 샌들을 신겼다. 운동화를 버리면 다음 날 등교가 문제다. 등굣길에 비가와도 마찬가지다. 운동화는 비닐봉투에 넣고 샌들을 신고 간다. 학교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기는 것이다. 운동화가 비에 젖으면 하루 종일 축축한 운동화를 신고 있어야할 판이니 그럴 수는 없어서다.  
비 내리는 육교의 정취는 언제나 늙은이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한 발 떼고 한 계단을 오르면서 ‘경상도 아가씨’를 개사한 - ♬ 사십 계단 층층대를 올라가는 할아비 울지 말고 속 시원히 웃어 봅시다♩---. 제법 큰 소리로 불러대도 자동차의 굉음에 묻혀간다.

이렇게 기러기 할아비와 손자의 하루하루는 동녘과 서녘을 넘나들며 지나간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손자가 이 할아비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찬도 참 맛있다고 하고 행동거지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애처롭다.
아빠와 누나가 창이 공항을 떠나던 날 애써 눈물을 삼키던 손자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을 헤집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36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여러분의 가내에 언제나 건강과 행운이 넘쳐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댓글과 쪽지를 보내주신 분들에게는 안부 쪽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고맙게도 만남을 주선하시겠다니 얼마나 반가운지요. 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주제넘은 과욕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답니다. 사실 여러분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안부 전한 것인데 모임으로 이어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받은 쪽지함에 있던 6월8일 이전의 쪽지가 모두 살아져 버렸습니다. 아마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삭제되는가 봅니다. 죄송하지만 6월8일 이전에 쪽지 주셨던 분들께서는 꼭 연락 주세요. 잊지 못할 분들이 너무 많은데 말입니다.
메일이면 더욱 좋고요. 그동안 소통이 없었던 분들도 연락 주세요.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정이 그리운 늙은입니다.
감사합니다.
<hgjung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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