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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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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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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의 추억-

예전 같았으면 고희(古稀)는 고려장 감이다.
세상 잘 만나 고려장은커녕 젊은이들의 광장에 끼어들어 글을 쓴다며 깝죽거리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얌체 같다. <고려장은 고구려 때에 늙고 병든 노인을 산에 버렸다는 습속이다>
남은 내 나이를 알아보는데 나는 내 나이를 믿지 못한다. 아직도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때에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 했다. 하늘의 별이 내 가슴을 아롱다롱 수 놓았다. 잘 나가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린 꿈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짚신을 신고 다니던 친구들에게 운동화로 뽐내던 우월감도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다. 기울대로 기운 가산을 정리하고 낯선 고향산천을 떠날 때 어린 새가슴은 오들오들 떨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족히 300미터나 되는 해협을 헤엄쳐 다니면서 가슴 깊숙이 품었던 코발트 희망이 거센 파도에 떠밀러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선친께서 들러 주시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련히 떠오른다.
선고께서는 열네 살 어린 몸으로 혈혈단신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 밀항했다. 광부로 연명하면서 광업소 소장에 오르고 서른에 오너가 되었단다. 하루에도 수없이 삶과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오른 자리라고 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광산에서 사람 목숨 하나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너에 달려있던 암흑의 시절이었단다. 아버님 방에는 권총 장총 단검 장검이 전리품처럼 걸려있었다고 했다. 어머님께서는 내 어릴 적에 이 이야기를 곧장 하시며 몸서리를 치셨다.  
그렇게 이룬 재산이 일개 면을 사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라고 했으니 아버님의 당시 재산과 세도가 어떠했는지 미루어 상상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재산도 나갈려니까 채 10년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 많고 많던 논밭이 한마지기 두 필지 팔려나가고 끝내 궁궐 같은 보금자리까지 잃어버렸다. 아래채로 거처를 옮겨 갔을 그 때 나의 충격은 형언할 수 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친구보기가 부끄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마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다.    

아버지는 쉰이 넘은 연세에 광부로 나가셨고 귀한 마님이셨던 어머니는 보따리 행상에 나셨다. 초라하다 못해 처참했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의 잦은 싸움은 어린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목이 부려지랴 머리에 이고 다니시던 어머니의 보따리 짐에 가슴 아팠던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컸었다. 나의 10대는 이렇듯 부모에 대한 연민과 갈등의 세월이었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출세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경야독의 지난 세월은 참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친구네 집에서 얻어먹은 옥수수가루 죽 맛은 아직까지 그 어떤 산해진미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내 아들에게 조차 숨기고 싶은 아픔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유일한 유산은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 머리 하나밖에 없었다. 아- 하면 어- 까지는 알아들으니까 말이다. 의사의 꿈도 젖고 법조인의 길도 포기해야 했던 불운은 지독한 축농증이었다.
제대로 읽고 외울 수가 없었다. 애를 쓰면 쓸수록 견뎌내기 힘든 몸이 되어갔다. 극심한 영향실조에 깊어지는 신병은 청운의 내 꿈을 비정하게 앗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팔자에 없었던 그야말로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소년기의 슬픈 추억이다.

그렇다고 어찌 사랑과 이별의 추억인들 없었을까.
출중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복스럽게 생겼던 여고 3년생, 사랑한다는 쪽지조차 보내지 못하고 몸져눕던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도 한 번쯤 그 때 그 일을 생각하였을까? 나를 두고 상사병을 앓을 만큼 젊은 한 시절 인기께나 있었든가보다.
  하지만 쓰다가 찢고 또 썼던 연애편지를 끝내 주지도 못한 채 속 알이만 하든 사모했던 여인도 있었다. 친구와의 삼각관계에 얽혀 질투와 미움을 안겨 주었던 야속한 여대생도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겠지?
‘사랑은 곧 그리움의 무덤, 이별의 찬가’라는 게 내 나름의 정의다.
사랑의 추억은 가슴 깊숙이 간직하며 남몰래 살짝 꺼내봐야 제 맛이 난다. 비밀스러울수록 아름답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철부지 시절의 이야기지만 이쯤으로 끝내는 것이 내 신상에 이로울 것 같다.

제정신을 차리고 자리를 잡자마자 지금 내 아내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고 세 아들을 얻었다. 진급도 빨라 서른 살에 부장이 되어 전국 네트망을 호령하기도 했었다. 속도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나였다. 하지만 빠른 오름은 빠른 내림이라는 세상 이치를 몰랐다.
오르내리기를 반복한 부침의 30대는 투쟁과 갈등의 세월이었다.
이 사이 아내는 아들 셋을 키우느라 기진맥진 했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참 늙은 나이에 철들면서 깨우쳤으니 아내의 인내와 고초가 오죽했겠는가?
40대에 최고 경영자가 되고 꽤나 큰 사회단체장에 오르는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지나친 도전은 잦은 시련을 안았다.  
뒤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인생여정이었다.

쓰러지면 도전하고 일어서면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나의 일기는 아픈 단어, 성취의 단어는 모조리 휩쓴 참 얄궂은 파노라마다.
그래도 녹 쓸지 않은 튼튼한 심신은 재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육십 중반까지도 나는 결코 늙은이를 거부했다. 40대 장년쯤으로 착각하며 씩씩했다.
그러나 일흔의 코밑에서는 무기력을 실감했다. 아무리 용을 쓰고 나이의 착각에 내 몸을 동여매도 힘없이 무너져 가는 데는 어쩔 수가 없다.
결정적인 동기는 5년 전 지인의 특허 기술력만 믿고 투자했던 회사가 망하면서 크나큰 손실을 안은 뒤다. 주체할 수 없었던 의욕과 도전이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이에는 장사 없다고 하였던가? 얼굴 깊숙이 파여 가는 억센 주름 살, 하얀 머리카락, 거짓말 같은 건망증은 ‘너는 이제 어쩔 수 없는 노인이야.’ 이렇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를 어찌나?
50대부터 이어온 아내의 전성시대 열기가 영영 식을 줄을 모르니 말이다.
40여 년 동안 주변 사람들과 차곡차곡 쌓아온 친분과 신뢰는 아내를 늘 내 곁에서 빼앗아 갔다. 단 하루도 집에 있는 날이 없었다. 부녀회장과 서클회장, 동호회 회장, 계모임까지 감투라는 감투는 다 썼으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잘나가던 마누라도 예슨 중반에 드니까 하나 둘 감투 내려놓기를 시작하더니 원로라는 뒷방 차지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안타까웠다.
내 비록 부엌을 지키고 외로움에 시달려도 아내의 왕성한 활동 하나만으로 만족했었다.

사실 나는 절친한 친구가 많지 않다. 십대 중반에 고향을 떠났고 전학과 이사를 밥 먹듯이 하였으니 나에게 있어 청춘이란 없었다. 사회 친구라야 경쟁의 상대일 뿐 속마음을 주고  받을 관계는 애초부터 형성되지 못했다.
게다가 술과 담배조차 못했으니 술친구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타고난 고독인생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집에 틀어박혀 있을 만큼 슬픈 노년은 아니었다.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내 몸 같은 친구만 없다는 것이지 잡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때울 친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귄지 30년이 된 동연배의 한 친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노타이 차림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국제신사다. 푹푹 찌는 한여름 더위에도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이다.  
나 역시 이 친구의 성화로 머리 염색을 거르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깨끗하고 젊게 살아야 한다는 게 그 친구의 지론이다.  
몸은 비록 늙어도 마음만은 늙을 수 없다는 노인들의 절박함을 대변하고 있다. 사실은 늙었다고 해서 희로애락의 감정마저 퇴색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재작년 겨울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아들로부터 싱가포르에 가서 1~2년만 손자들을 돌봐 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다. 참 고민스러웠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아내와 그의 친구들 간의 단절이었다.
아들딸과 며느리 사위 그리고 손자들 자랑으로 행복한 여인들의 삶을 훼방하기 싫어서였다. 나는 이 두 갈레 길에서 무척 망설이고 있었다. 손녀 손자를 더 이상 이국만리 타국 땅에 홀로 내버려 둘 수도, 그렇다고 아내에게 선뜩 가자고 제안하기도 난감했던 것이다.
아내인들 왜 고민스럽지 않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에서 나의 결정이 곧 자기의 결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더 많은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우리 딱 2년만 고생합시다.”라고 제안하였을 때 아내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듯 선뜩 동의했다. 정말 미안했다. 나만의 손자들이 아니지만 그토록 말문을 열기가 어렵다 못해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결정을 짓고 나니까 서로 홀가분해 졌다. 오히려 더 빨리 가고 싶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손자가 그토록 안쓰럽게 다가올 수 없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소통할 수 있는 말과 글만 깨우치면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없는 것인가? 코피 터지는 치열한 생존경쟁 교육은 아이들에게 있어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다. 나는 가끔 “산다는 게 무엇인가? 왜 행복이라는 허상에 매달리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있는 그대로, 되는대로, 그저 그렇게, 자연스레 살 수는 없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필경 25,600일의 긴 여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생존경쟁이라는 핑계로 알게 모르게 그랬을 것이다. 상생의 철학에 인색했던 삶의 손익계산서에는 오로지 회한만 남는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일단 접고 싱가포르에 왔다. 첫 선물로 받은 것이 소음과의 전쟁이었고 급기야는 아내의 교통사고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후회해도 분노해도 이미 벌어진 고약한 사건들이다.
이 일로 인하여 아내는 끔직한 기억으로 귀국했고 나는 기러기 할아비가 되었다. 주어진 숙명으로 여기기에는 너무도 억울한 결과였다.

지난 3월 첫 토요일이었다. 손자가 매주 두 번씩 가는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체중계에 몸을 얹었다. 젊어서부터 여태까지 늘   60kg으로 한결같았던 체중이 갑자기 3kg이나 빠진 것을 알았다. 불안한 마음이 온통 가슴을 짓눌렸다. 고령으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겪었던 증상이 떠올랐다. 손자 녀석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뒤돌아 오다가 금방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에 육교 난간을 잡고 한참 동안 진땀을 흘렸었다.
혹시 무슨 못 쓸 병이라도 걸리지 않았는지 별이 별 방정맞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때 “이러다가 혹시라도 길바닥에 쓰러지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안되겠다 싶어 ez-link 카드 뒤쪽에 내 신상정보를 기록하여 붙였다. 아내의 교통사고를 보면서 사람 사는데 “만약”은 언제든지 있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어 더욱 절실했다. 그토록 심각했던 체중 소동은 체중계의 오작동으로 판명되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늘도 이 할아비와 뒹굴던 손자는 이제 막 잠이 들었다. 티 하나 없이 맑고 밝은 손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의 싱가포르 입국 결정은 결코 잘 못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또 다른 노년기의 추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일흔의 중반기를 넘기고 있는 이즈음 나는 그 누구보다 별나고 요란스런 70년간의 추억을 펼쳐 들고 있다.  
그토록 가슴 시리던 서러움과 아픈 기억마저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어인 일일까?
늙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도 했다. 나는 그 하고많은 추억을 먹을수록 허기진다. 이 또한 웬 일일까?
  인생이란 어차피 일장춘몽(一場春夢),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아니던가.
  인간이 추구하는 건강하게 사는 법은 끊임없이 추억을 만들고 그 추억을 즐기는 것이라는 내 나름의 철학에 충실하려 한다.

                                                                                          <31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30회까지 썼다는데 가슴이 벅찼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성원 때문입니다. 시작할 때는 30회에서 끝낼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낯모르는 사람들끼리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인정의 끈을 내려놓을 수 없어서입니다. 여러분들의 성원이 있고 여건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써 보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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