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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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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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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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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7일 싱가포르 날씨는 좋았다. 한국의 일기예보도 나쁘지 않았다.
손자랑 나랑 귀국하는 날이다. 애써 버텨온 인내를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던 격정이 솟구친다.
아침 6시 40분 여느 때처럼 손자랑 손잡고 등굣길에 나섰다. 손자의 맥박도 힘찼다.
그토록 기다리던 귀국이 가슴에 벅차오르는 모양이다. 내가 그런데 손자는 오죽하겠는가?
일주일 전의 저녁이다.
손자가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와 누나와 통화를 끝내고 울었다. 깜짝 놀랐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나 참고 견뎠을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끌어안고 등을 도닥거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보고 싶지, 이제 여섯 밤만 자고나면 볼 수 있지 않니, 사나이는 언제나 씩씩하고 당당해야지 약하면 안돼.라고는 하면서도 내 마음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3일 뒤에도 손자는 또 울었다. 만날 날이 가깝게 다가올수록 더 보고 싶다면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오로지 의지 할 곳은 너랑 나랑 단 둘이다. 꼬-옥 껴안고 서로가 서로를 달랬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늘이야 말로 하늘을 나를 것 같은 기분임에 틀림없다.
쓸고 닦고 집안 구석구석을 대청소했다. 가스레인지도 변기도 깨끗이 닦았다. 집안의 청결은 곧 내 마음의 그림자다. 되돌아 왔을 때 내 마음이 깨끗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후 1시 30분 손자를 마중 나갔다. 먼발치에 비친 손자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운 발길로 귀가했다.
손자는 손자대로 가방을 챙기고 나는 나대로 마지막 짐을 점검했다. 40킬로를 맞추기란 쉽지 않다. 부칠 짐 두 뭉치와 기내 휴대용 하나지만 만만찮은 무게였다. 손녀가 못다 가져간 책과 물건이 많았다.
오후 5시께 저녁을 먹었으나 설레는 가슴이 밥맛조차 날려버려 몇 숟갈 뜨다가 말았다. 이웃 노인에게 손자가 아끼는 싱가포르 국화 orchid를 맡겼다. 눈인사만 하던 사이인데도 기꺼이 맡아 주어 고마웠다.
약속된 7시 반, 짐을 끌려 내렸다. 나 혼자 힘으로는 버거운 무게였다. HDB의 긴 복도가 너무도 멀리 느껴졌다. 큰 도로까지 나가지 않고도 용케 집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창이국제공항 제2청사로 달리는 싱가포르 밤길은 그 어떤 감동도 주지 못했다. 그저 달리는 찻길일 뿐이었다. 아내를 만난다는 벅찬 감정을 비집고 들어올 여분이 없었다.
8시에 공항 2청사 1번에 자리 잡은 아시아나항공에 도착했다. 전광판은 5분 뒤 오픈을 알리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내 눈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혹시 서생이 아니신지요?’라며 누군가가 다가올 것만 같았다. 은근히 기다려졌다.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알아보는 분이 있었으면 약속한대로 꼭 차 한 잔을 사 주고 싶었다.
이국땅에서, 그것도 쉼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항에서, 비록 낯설지만 교민들끼리 반갑게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었다.
다행이도 짐의 무게는 기내 휴대용 짐까지도 무료 탁송할 수 있어 간편했다. 손자는 할아버지 참 간편해서 좋네요.라며 책가방만 달랑 메고 까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귀국하는 분들을 좀 더 기다려 보고 싶었으나 내 마음속을 알 리 없는 손자의 성화 때문에 입장할 수밖에 없었다.
휘황찬란한 면세점들을 눈요기하며 27번 게이트에 다다랐지만 아무도 없었다. 손자는 의자 옆에 붙어 있는 간이받침대를 끌어내어 신기해했다. 책을 꺼내놓고 폼을 잡기도 했다.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나는 디카와 캠코더에 손자의 모습을 담았다. 간간히 스쳐가는 사람들 밖에 없어 한 동안 썰렁했다. 검색대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1시간도 더 기다려야 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동심은 무빙워크를 노리개 삼아 돌아 다녔다.
시간은 가고 여행객들도 한 사람 두 사람 모여 들기 시작했다. 내 눈은 온통 서생을 알아보는 이가 없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학생을 대동한 엄마들은 많지 않았다. 탑승객도 눈에 띄게 적었다. 우리가 귀국길에 먼저 나선 것인지 여름방학에 귀국하는 분들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영구 귀국한 분들이 많아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이런 저런 사연들을 담았을 항공기는 귀국을 목마르게 기다렸던 어느 할아비와 손자도 함께 싣고 이륙했다.
손자는 의자 앞에 붙은 모니터를 보면서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느냐고 불평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고 항속은 700Km를 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800~900mph까지 내던 속도였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기름 값을 아끼느라 속도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6시30분이었다. 30분이 지연된 시간이었다.
손자는 내 허벅다리를 배게 삼아 기내에서 줄곧 잠들어 있었다. 6시간 반의 기내 시간은 나에게 있어 고통 그 자체였다. 허리도 어깨도 머리도 육신 곳곳이 아팠다. 할아비의 고통을 알 리 없는 손자는 인천공항이라는 말을 듣자 펄펄 날았다.
신종플루의 열 탐지기 앵글이 입국자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여 준비했던 마스크가 필요하지 않음을 느꼈다. 미주 쪽에서 입국하는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손자는 입국수속 대 앞에 들어서자 우쭐거리다 못해 콧노래도 불렸다. 소녀시대의 지지다.
날쌔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 찾는 곳에 갔다. 19번 벨트가 손자의 애간장을 태웠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짐을 두고 짜증을 내는 손자가 우스웠다. 10여분의 시간이 10시간쯤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손자가 아빠와 엄마의 품에 껴안긴 시각은 28일 이른 아침 7시20분쯤이다. 엄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우리 아들 뚱보가 되었네. 첫 인사말이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애틋한 그리움과 진한 사랑을 측량할 수 있었다. 더는 말이 필요하지 않는다. 역시 부모이고 자식이다.
고향으로 가는 승용차는 아침 공기를 시원스레 갈랐다. 대한민국의 산하가 새삼 아름답다. 고속도로 곳곳에서 손님맞이를 하는 휴게소도 정겹다. 예전에 예사로웠던 곳들이다. 이 또한 용렬한 사람의 마음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6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손자는 엄마 아빠를 만나는 순간 귀국의 의미와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오로지 아내에게 있어 손자와 할아비의 사이에도 분명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절뚝거리면서 나왔다. 반가움보다 가슴이 저며서 할 말도 잊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아내느라 여간 힘들지 않았다. 아내 역시 그랬을 것이다. 원망도 하소연도 그냥 그대로 묻어야 하니까.
아내는 손자의 손을 잡고 아이고 내 새끼가 왔고나.며 볼을 비볐다.
손녀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께다. 4개 월 만에 만나는 오누이는 담담했다. 오죽 반갑겠는가마는 표현이 서툰 것이다. 누나 선물로 열쇠고리를 사 왔다. 돼지 저금통도 예쁘지.가 첫 대화다.
둘이서 자기들의 방으로 가기가 바빴다.
이제 어른들의 대화다. 당연히 아내에 대한 이야기다. 병원에서는 6개월이 지난 중순까지도 수술자리가 다 붙지 않아 한 달 더 있어야 장애 여부가 판가름 나겠다고 했단다. 문제는 아내와 같은 경우 거의 대부분이 완전한 걸음걸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절게 마련이라는데 절망감이 엄습한다.
죽지 않은 것만도 천행이라던 그 때의 절박감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정상적이냐 아니냐에 목을 매는 사람의 간사함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욕심인 것을 어쩌랴.
두 번째 관심사는 손녀의 한국학교 적응문제다.
한 달 동안의 국어 사회를 과외공부 하여 초등학교 6학년 수학능력 시험에는 무난히 통과하여 3월 새 학기부터 다녔다. 그런데 사회 첫 시험에서 100점 만잠에 20점 밖에 받지 못했다고 했다. 본인이나 부모가 모두 실망할 일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며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아들과 며느리의 낙천적인 성격을 손녀도 닮은 것 같다.
하지만 어찌 그렇기만 하였겠는가?
더 큰 문제는 영어 학원에서 생긴 일이다. 유학 이전에 5년간 다녔던 영어학원 이력에다 유학 2년 반이라는 영어 스펙(경력)으로 고급반에 편성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학원 시험에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표를 받았다는 것이다. 학원 선생님이 걱정스럽다는 말까지 하였다고 했단다.
그렇지만 애비는 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식 영어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평소의 생각 때문이었다.
주어와 동사나 따지는 영어 교육방식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손녀에게 전혀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영어 대 영어에서 한국어 대 영어가 문제였다. 뜻은 알지만 한국어로 표현을 못하는 대목이 상당부분 있다는 것이다.
EBS에서 주관하는 토셀쥬니어에 응시하여 단 한 문항만 틀려 97점(1등급)을 받았다고 했다. 그 때서야 영어 학원에서도 자기들의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행여 학원에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귀국 이후 계속하고 있는 필리핀 선생과의 국제전화 영어수업은 계속할 것이라 했다. 어쨌건 아이들의 영어 공부는 오나가나 문제 중의 문제다.
얼마 전에 청심국제중학교 2010년 입학 설명회에 다녀왔다고 했다. 참석인원이 2000명을 웃돌더라는 것이다. 영어는 기본이고 제2외국어와 수학 과학 경시대회 입상 경력과 창의력, 리더십 등이 중요 평가 기준이라고 하더란다. 예사로 까다롭고 어려운 관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더더욱 문을 좁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한국교육의 현주소다.
실력대로 능력대로 가고 싶은 학교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평준화의 부작용이다. 여건만 되면 조기유학을 보내고 싶다는 학부모가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가 공교육의 심각한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다.
아들 내외는 아버님의 권유를 받아들인 게 참 다행이라고 했다. 영어유학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2~3년이면 적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님 혼자서 손자를 데리고 계신다는데 대해 모두 거짓말처럼 깜짝 놀란다고 했다. 어떻게 할아버지 혼자 외국에서 손자를 돌보고 있느냐는 것이란다. 영어를 무척 잘 하시니까 외국 생활에 큰 문제는 없으신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버님의 고생하시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라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손자를 데리고 외국 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해 크게 별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인데 자꾸 주변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런가 싶을 뿐이다.
물론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말했듯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결정하고 밀고 나가는 것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자 능력이라 여길 뿐이다.
아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했다. 불만불평도 없었다. 평상심 그대로다.
그럴수록 애가 타는 쪽은 나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장애만은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힘들게 한다.
대퇴부의 수술 자리는 길게 꿰면 자국이 함몰되어 있었고 담낭을 제거한 수술자리 역시 거칠었다. 무슨 운명이 한꺼번에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얗던 몸에 끔직한 칼자국이 두 개씩이나 있다는 사실 앞에 숨이 멈춘다.
아내는 내가 상심하는 모습을 보며 모두 잊자며 오히려 위로했다.
그리고 당신 혼자 있게 할 수가 없다며 싱가포르에 들어 갈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눈치였다.
사실 교통사고 소송이 임박했다. 피해자 본인이 법원에 나가서 진술을 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도 있어 그렇다.
그렇다고 아내를 싱가포르에 가자고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28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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