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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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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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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선임과 이삿짐-

아들은 창이공항 탑승에서부터 인천공항 도착과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수시로 전화하여 상황을 알렸다. 비행기에서도 편했고 인천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큰 아들과 만나 집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일요일이어서 큰 병원으로 바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집에까지 큰 탈 없이 잘 도착하였다는 전화를 끝으로 아내는 모국의 품에 안겼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변호사 선임과 집구하기다.
3층 효서 엄마를 만났다. 16일 귀국하여 12월31일 입싱 한다고 했다. 저희 이사 짐을 맡길 수 없는지 물었다.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녀와 손자가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적어진 옷가지가 꽤 있었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한국촌‘에 헌 옷가지 가져갈 분을 찾았다. 곧장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모두 이웃 분들이었다. 따님이 있는 분과 아들이 있는 분이 있어 용하게 맞았다. 고마워하는 모습에서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박스를 구하기 위해 승송시장에 갔으나 없었다. 생각 끝에 콘도 지하에 있는 재활용통을 뒤지기로 했다. 하루 두 번씩 이틀을 오르내리던 끝에 크고 작은 각가지 박스 20여개를 수집했다.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집세 한 달 치를 미리 주면 한 달치 디포짓을 돌려 줄 테니까 집을 비어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곳 사람들의 희한한 셈법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데 사실은 디포짓 두 달 치를 포기하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무리한 이야기를 하면 11월분부터 집세를 주지 않고 두 달을 살다가 나간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대사관에서 추천해 준 한국인 변호사를 다음 날 오후 3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내는 시립의료원에 입원하여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피곤하다. 때때로 현기증도 있어 이러다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이래서 과로사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바쁘게 짐을 챙겼다. 손자 손녀의 옷과 책을 가려서 담았다. 이삿짐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챙겨보면 엄청나게 많아진다. 줄잡아 스물다섯 박스는 될 것 같다. 고민이 생겼다. 이 많은 짐을 3층에 넣을 곳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설령 넣을 수 있다고 해도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변호사와 만날 약속시간 때문에 짐을 챙기다가 말고 밖을 나섰다.
알려 준대로 래플즈 MRT에서 내려 VTB빌딩을 물어 찾아갔다. 8층 변호사 사무실은 로펌답게 그 규모가 컸다. 입구 안내원에게 한국인 변호사를 찾았더니 상담실로 안내해 주었다.
앞뒤의 책장에는 법전과 판례집으로 가득했다. 2~3분 뒤에 검정 정장차림의 30대 중반의 날씬한 여성이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예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최원형입니다.’라며 앉기를 권했다. 일단 동족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고 영리해 보이는 첫 인상에 믿음이 갔다. 아내의 여권 복사본과 내 여권을 내 놓았다. 곧 바로 복사하고 돌려주었다. 경찰서 진술서와 병원 진단서 복사본을 주었다. 경찰서 조서부터 보았다. 조서에 피해자의 진술을 통역인이 통역을 하였다는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사고 차량넘버를 달려오는 차를 보고 알았다.’고 되어 있다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이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 넘버를 무슨 재주로 보고 외우겠는가?
넘버를 안 것은 경찰관이 와서 사건 경위를 물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니까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모두 언어불통에서 오는 문제다.
피해자의 진술내용상으로 보면 전적으로 가해자 과실인데 가해자가 과연 사실대로 진술하겠느냐는 것이다. 거짓말로 우기면 과실을 가리는데 애로가 많다고 했다. 입증 책임이 각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대 말’이라고 했다. 어느 쪽 변호사가 설득력 있는 변론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른다.

싱가포르의 교통사고 처리와 보상법은 피해자가 변호사를 통해 가해자를 상대로 병원치료비와 ‘마음 아픈 보상’, 후유장애, 기타 경비(간병인 비용, 교통비, 치료에 관련된 직.간접 제반 비용)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 기해자의 보험회사 변호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그쪽 변호사와의 법정 싸움이 시작되는데 피해자의 과실 프로테이지에 따라 보상금이 결정 된다는 이야기다. 만약 피해자의 과실이 30%가 인정되면 피해보상금은 70%밖에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실례로 얼마 전에 60대 노인이 무단횡단을 하다가 다친 사건이 있었는데 피해자 과실이 20%로 인정되어 보상금 청구액 8만 불의 80%인 6만여 불을 받아 주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소송비용은 피해자 측 변호사비도 가해자 측 보험회사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가 변호사를 선임할 때 부담은 피해사실을 입증하는 제반 조사와 교통 우편료 등을 미리 내야 하는데 통상 1000~3000불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임할 때 우선 1000불을 내고 비용 발생에 따라 그 때 그 때 내라고 했다.

선임계를 내면 변호사는 경찰서와 병원에 관련기록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 기록이 변호사 사무실에 도착하기까지는 무려 3개월 이상 시일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재판절차에서 판결이 끝나고 판결문이 경찰서에 도착하여 변호사 사무실에 오기까지 6개월 정도 걸리니까 무려 1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만약 가해자가 항소를 제기하면 또 더 걸린다고 하니까 교통사고로 다칠 경우 가해자(보험사)로부터 치료비를 받기까지는 최소 기간이 1년이라는 이야기다.
느림보 행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참으로 기가 차는 노릇이다.
가장 특이한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직접적인 보상협의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처럼 자동차 사고로 인한 치료비는 사고차 운전자의 보험회사가 보증하여 무조건 치료하여 주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사고 운전자는 과실의 정도에 합당한 형사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나고 피해자는 소송을 통한 보상금이 나올 때까지 자비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고 운전자의 처벌 수위는 피해자의 사망이나 음주운전이 아니면 구속은 없고 대개 벌금으로 끝난다고 했다.

현지인들이 교통사고로 다쳤을 경우는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받게 되어 큰 부담이 없다고 했다. 즉 피해자의 보험회사가 피해자에게 지불한 치료비는  가해자의 보험회사에서 받게 되니까 피해자의 부담을 일시적이나마 덜어주는 역할인 것이다.
문제는 외국인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는 예사 낭패가 아니다.
한국처럼 현장조사도 없다. 사고 현장에 출동했던 결찰관의 메모가 현장조사를 대신하는 모양이다. 검찰의 조사도 없다. 경찰서의 조사가 끝이다. 경찰서의 조사는 가해자의 진술과 증인에만 치중한다고 했다. 가해자가 시인하면 그것으로 끝이고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기소하는 것으로 종결된다고 했다.

가해자가 사실을 부인해도 피해자의 반론권도 없다. 다만 재판정에서 판사가 필요할 때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을 불러서 심문하는 방법이 유일한 반론 기회다.
어찌 보면 간소하고 신속할 것 같다. 하지만 허술하고 느림뱅이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법원의 판결문이 경찰서로 가서 경찰서에서 본인이나 변호사에게 전달된다는 것도 한국과는 딴판이다.
다음 날 1000불을 납부하고 선임계에 사인하는 것으로서 변호사 선임절차는 끝났다.
한국에서 발생하는 진료비와 기타 경비는 꼭 영수증을 첨부하여 보내달라고 했다.
추후 한국에서 발행하는 진단서는 공증인의 공증을 받아서 보내야만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수술 받은 부위를 촬영하여 보내 달라고도 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기가 바쁘게 대사관에 갔다. 그 동안 너무 많이 애를 먹인 분을 만나 고마운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나를 본 그 분은 도리어 나에게 위로의 인사를 하면서 무척 수척해 졌다며 안쓰러워했다. 집 문제를 시원스럽게 해결 해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몸 둘 바를 모르게 하는 겸손이다. 내가 드릴 말씀이라고 답례했다.
퇴근시간이 이미 지난 시각이어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에이전트가 연락 오면 디포짓 한 달 치를 달라던 것도 양보하여 2000불만 주면 집을 비우겠다는 재 협상안을 제시하고 나왔다. 이래서 조국이 있어야하고 힘 있는 조국이어야 한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한국인 에이전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버스 인터체인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HDB를 보기 위해서다. 처녀처럼 날씬하고 예쁜 30대 중반의 아주머니 두 분이 왔다. 자기들의 승용차를 타고 갔다. 보기로 했다는 아파트에 도착하자 현지인 에이전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금방 알아채고 인사를 나눈다. 나도 눈인사를 했다. 한국인 에이전트와 현지인들이 공조하고 있었다. 방 세 개짜리 HDB는 내가 살고 있는 콘도보다 더 크고 좋았다. 거실도 두 개나 되었고 레노베이션도 너무 잘 되어있었다. 2500불인데 200불 깎아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그렇게 큰 규모의 집이 나에게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기왕 간 것이라 그저 보고만 돌아섰다. 방 두 개짜리 콘도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돌아오기가 바쁘게 짐을 챙겼다. 주방의 그릇과 식품을 박스에 담고 깨끗이 청소했다.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3층에 전화하여 짐이 너무 많아 송구스러워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 거실 입구를 좀 치우고 놓으면 될 것이라고 상냥스레 말했다. 그렇기는 해도 무리일 것 같았다.
정보지를 뒤져서 한인 이삿짐센터에 전화했다. 짐을 맡기는 가격은 박스 20개 당 1개월에 최소 400불에서 600불이라고 했다. 같은 한국 사람들이니까 좀 싸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규정이 그렇단다. 융통성도 없어보였다. 예상보다 비쌌다.
일단은 짐부터 모두 싸 놓고 생각해야 되겠다.
입맛도 반찬도 만만찮아 계란프라이에 김치 하나로 주방에서 선채로 한 숟갈 먹었다. 이 게 습관이 되었다. 지치고 귀찮아 앉기도 싫다. TV를 켜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져 포기했다.
나에게 있어 곁에 가족이 없다는 것은 음음적막이다.
내일이라도 집을 얻으면 짐을 맡기지 않아도 될 일인데 어디 세상사 마음대로 되던가.
이사할 집은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덜렁 나가기라도 하면 정말 낭패라서 서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을 염려해서 짐을 맡겨 둘려는 것이다.

14일 저녁이다. 3층 효서 엄마가 카트를 가져 왔다. 엉겁결에 짐을 들어냈다. 카트가 있어 수월했다. 출입문 쪽 거실의 한편이 비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8층과 3층을 쉴 새 없이 오갔다. 땀은 비 오듯 줄줄 흘려 내렸다. 열 번 쯤 갔다 왔다 하면서 무려 스물다섯 박스나 옮겼다. 그럼에도 대엿 박스는 남은 것 같다.
효서 엄마도 몇 번 거들다가 귀국하는 이웃 엄마를 도와주려고 갔다.
짐은 거실 앞자리를 천정까지 점령했다. 효서도 이틀 뒷면 귀국길에 오르지만 그간이라도 여간 답답할 게 뻔했다. 내 편하자고 너무 무리한 것 같아 미안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입술은 타고 기운은 쭉 빠졌다. 하지만 이제 여유가 생겼다. 효서 엄마가 돌아오는 12월 말까지만 집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귀찮게 여기지 않고 선뜩 도와준 효서 엄마가 너무 고마웠다.
아내는 입원 치료를 잘 받고 있다고 했다. 3층 효서 엄마가 짐을 맡아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미안해서 어쩌나.’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라고 했다. 아울러 문병 왔던 여러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을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홑이불과 아이들 신발을 세탁했다.
나머지 이삿짐 가운데 노트북과 음향기기, 가전제품 그리고 압력밥솥과 커피포트와 이부자리, 세면도구 정도만 남겨 두고 깨어지기 쉽고 길고 거친 물건은 들고 갈 수 있도록 포장했다. 서 너 시간이면 옮길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다음 날부터 팬티 차림으로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언제 나가더라도 ‘깨끗이 사용하였다.’는 평판을 남겨야 한다. 코리언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변기 욕조도 반들반들 광이 나도록 씻고 닦았다. 구석구석 쓸고 닦다보니 반나절이 걸렸다. 이제 집이 하루라도 빨리 나가기만을 빌어야 했다.

                                                        <26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April 님, 해녀 님 반갑고 감사합니다. 늘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살맛이 납니다.
엊그제 아내와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건강한 몸으로 다녀왔었는데 올해는 절뚝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면서 말입니다.
어쨌든 아내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제주도의 빼어난 풍광과 넘쳐나는 볼거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寶庫였습니다. 금수강산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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