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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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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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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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포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

지난해 한인회가 마련했던 ‘정월대보름맞이 경로위로연’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우리 그리고 주변의 이야기 모두가 인생이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위로연에서 만나 헤어 진지 열흘 쯤 지난 어느 날 김 노인네 집에 전화했다. 뜻밖에도 내가 사는 콘도 바로 옆에 있는 HDB에 살고 있었다. 역시 좁은 나라였다. 너무 반가웠다. 며칠 뒤 날을 잡아 집 앞에 있는 마을식당에서 넷이 만났다. 자연스레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왔다. 중학교 다니는 손자 하나 데리고 산다고 했다. 사연이 딱했다.

손자가 여섯 살 되던 해에 한국에서 살고 있던 큰 아들과 며느리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이혼 했다는 것이다.  이혼 한 줄도 모르고 있던 어느 날 며느리가 싱가포르에 들어와서 손자만 버려두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날부터 여태껏 맡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다.
큰 아들은 이혼 이후 베트남에서 여행사를 하면서 혼자 살고 있는데 손자는 자기 아빠한테 안 갈려고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생각조차 하기 싫어한다고도 했다. 며느리 역시 가버린 뒤부터는 10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연락조차 없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아내가 거들었다. 짐승도 자기 새끼가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돌봐주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그토록 비정할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 엄마가 자식을 버리는 행위는 이유가 필요 없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마지못할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떠봤더니 아내의 생각은 단호했었다.
부부야 등 돌리면 남이라고 하지만 자기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키우고 배 아파 낳은 자식에게까지 어쩌면 그렇게 모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손자가 공부도 하지 않고 말도 잘 듣지 않을 때면 한국에 나가 엄마라도 찾아보라고 하면 펄쩍 뛴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없다’고 한단다.

노인네들이 만나면 화제의 초점은 언제나 자식들과 손자들에 맞추어 진다. 그리고 서로의 건강 이야기다.  
손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의 눈시울엔 어느새 이슬이 맺혀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나도 아내도 숨이 차올라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왜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 곳곳에서 흔한 일로 벌어지고 있을까? 이것이 개인주의 만능의 현대사회상이라면 가혹하고 슬프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다. 어느 누군들 아픈 사연이 없는 이가 있겠는가. 주어진 운명이거니 여기며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에둘러 위로했다.

23년 전 자기들이 싱가포르에 올 때만 해도 한국교민들이 얼마 되지 않았고 한국과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사업도 잘 되었다고 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사는 한국에서 넥타이와 옷가지를 수입해서 팔 때라고 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고 했다.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술자리가 많았고 그 결과로 음주운전에 걸려 7일 간의 감옥살이도 하였다고 했다.
실패하기 시작한 것은 믿고 거래하던 현지인으로부터 돈을 몽땅 떼인 때부터라고 했다.
한국에서 의류를 한 컨테이너 보낸 것을 인도네시아로 빼돌려 팔아먹고 물건 값은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에 고소도 하고 민사소송도 하였지만 얻는 것은 좌절과 분노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이방인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엎어진데 겹친 격으로 중국산 싸구려 의류가 밀러들면서 폐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세상살이 어느 누구인들 순탄할까마는 이들도 가혹하리만큼 인생 역전을 넘나들고 있었다.

김노인은 오래전부터 무릎 병에 시달려 거동이 힘들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해삼장사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해삼은 질도 좋고 굵어서 한국과 중국 홍콩으로 많이 수출이 되고 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인도네시아 어촌까지 들어가 좋은 상품을 직접 골라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알아준다고 했다. 밑천이 짧아 보따리장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것이다. 한 컨테이너씩 거래할 정도가 되면 괜찮은 장사라고 했다. 중품의 경우 1톤당 미화 70000$씩 한다니까 10억쯤 있어야 제대로 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 대단한 할머니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흔 줄의 할머니가 외국에서 또 외국으로 드나들면서 물건을 수집하고 거래처에 붙이고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 며칠 뒤 김노인 집에 갔었다. 싱가포르의 HDB 내부 구조를 처음 봤다. 방 3개에 거실과 주방이 넓어서 내부는 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풀장이 없고 엘리베이터가 깔끔하지 못하고  출입구에 관리실이 없다는 것 말고는 크게 뒤질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은 인도네시아산 말린 해삼을 여러 개 내어 놓았다. 시꺼먼 해삼도 있고 황갈색도 있고 손가락 크기에서부터 갓난 아이 팔뚝크기만 한 것도 있었다. 고급품은 1kg당 150$이나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세계적인 불경기로 거래가 많이 줄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김노인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장사할 때 팔다가 남은 것이라며 파란색의 실크 넥타이 하나를 나에게 주었다. 소파와 TV는 우리 집 것보다 더 깨끗하고 좋다고 말했더니 중국인이 주인인데 사람이 참 좋다고 했다. 이사 들어 올 때 모두 새것으로 바꾸어 주더라며 칭찬했다. 여러 집을 다녀봤는데 인×와 인×××× 주인들 집은 아예 얻지 않는다고 했다. 트집이 유별나고 디파짓은 예사로 떼어 먹는다고 혹평했다. 사람 나름이 아니겠느냐고 했지만 우리 집 주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소음 때문에 한참 신경전을 하고 있을 때여서 그랬다.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김노인이 귀국해서 한의원에서 무릎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작은 아들 집에서 통원치료를 한다기에 참 잘 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자기도 해삼 값을 받기 위해 한국에 나간다고 했다. 행여 자기 손자가 돈이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몇 푼씩 주라고 했다. 어느 날 부인의 전화를 받고 그 손자에게 돈을 주기위해 김노인 집에 갔었다. 체구가 엄청 큰 까만 학생 대여섯이 얼굴에 인디언 페인팅을 하고 떠들고 있었다. 김군을 부르니까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김군은 체구가 나이에 비해 적었고 얼굴도 온순형인데 친구라고 모인 아이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군을 밖으로 나오라고 하여 돈을 주었다. 친구들 앞에서 주면 단번에 다 써버릴 것 같아서 김군의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해서 절약하여 쓰라고 일렀다.  
부모 없이 외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실상을 보는 것 같았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양 망측스런 생각들이 가슴을 짓눌렸다. 이 날 나의 상상은 허상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뒤 나타난 현상은 어이없었다. 콧방울에 금속 링이 박혀 있었다. 녀석은 돈을 빌리려고 내가 사는 콘도로 친구들과 오면서 그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열여섯 살의 중학생 차림새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할머니가 죽기 살기로 애써 키운들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어느 날 김노인이 집에 왔다고 했다. 다 나아서 돌아온 줄 알았으나 낫기는커녕 병을 하나 더 얻어 왔다고 했다.
  한의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현관 앞으로 나서다가 앞사람이 문을 열면서 뒤로 나자빠지며 김노인을 덮쳐 아픈 다리의 고관절이 부려졌다는 것이다. 참 기가 막히는 일이다.
참 지지리도 운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듣는 나의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하고 왔느냐고 물었다.
한의원에서도 책임이 없다고 하고 자기를 덮친 사람도 고의성이 없다면서 본체만체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골절 수술 이후부터 오른쪽 손에 힘이 없고 떨려서 밥숟갈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불행과 불운은 모조리 떠안은 사람 같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 앞에서 나 또한 할 말을 잃었다.
하도 기가 막혀 ‘둘째 아들 집에 있으면서 치료를 받도록 해야지 그토록 아픈 몸으로 의료비도 비싼 싱가포르에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아들 집도 더 이상 있을 입장도 아니라고 했다. 알 듯 모르를 듯 했다. 요새 어지간한 효부가 아니고서야 늙고 병든 시부모를 뫼시겠는가?  

마치 내가 당한 일처럼 두고두고 가슴이 시렸다. 한참 소식이 없더니 부인이 이사하였다고 전화 왔다.
월 1400$에 살고 있던 HDB가 팔려서 탬파니스 근처 방 한 칸짜리로 급히 옮겼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좋다던 주인도 자기들의 이해관계 앞에서는 단 한 치의 양보나 배려도 없더라며 한 숨 쉬었다.
우리 함께 바람도 쐬고 90일짜리 여행 비자 연장도 할 겸 조호바루에 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때 취득했던 영주권도 반납하고 없다고 했다.
10시 반께 부기스 엠알티 앞에서 두 내외를 만났다.
김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부인의 부축을 받아 겨우 한 발씩 옮기는 수준이었다.
나는 조호바루에 처음 가는 길이었다. 두 부부는 많이 들락거려 방법과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500미터쯤 걸어가자 조호바루에만 오가는 택시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택시비는 1인당 SGD 10$이었다. 네 사람이 타야 출발한다는데 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이어서 기다릴 것도 없었다. 나누어 주는 말레이시아 입국신고서를 미리 작성하여 여권과 함께 택시기사에게 주었다. 기사는 바로 옆자리 손님에게 여권을 모두 맡겼다. 기사옆 좌석 손님은 조수역할을 하는 셈이다.
택시는 예전의 우리나라 일명 ‘총알택시’와 똑 같았다. 엄청 빠르게 달려 불안하기까지 했다.

김노인네 손자이야기가 나왔다. 김노인 내외는 손자의 행실을 알고 있었다.
몰려다니는 친구들과 떼어놓기 위해 전학도 시도했으나 학교를 옮기기도 쉽지 않아 차일피일 지내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나무래도 소용도 없고 오히려 반발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결손가정의 심각한 문제였다.
싱가포르 출국장에 도착하자 출국 심사를 하는 곳은 마치 우리나라 고속도로 요금소 모형의 구조물이었다. 택시 기사가 네 사람의 여권을 내 밀었다. 우리에게 얼굴을 창문 쪽으로 내 밀라고 했다. 여권 사진과 대조하는 것이다. 별 말 없이 스탬프를 쾅쾅 찍어주었다. 말레이시아 관문은 언제나 한가롭다.

택시는 조호바루 컨벤션센터 근처에 멈췄다. 김노인은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었다. 지난해 경노잔치 때의 건강한 모습은 어디에 갔을까? 이래서 노인들은 언제 이별을 고할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이쪽 음식에 자신이 없어 맥도날드에서 햄버그를 먹었고 그들은 말레이시아 밥을 먹었다. 우리는 두 시간쯤 보낸 뒤 싱가포르로 가는 택시 정유소에 갔다. 손님은 드문드문 있었다. 10RM(링깃)을 주고 택시에 올랐다. 싱가포르 택시보다 낡은 택시다. 환율로 따지면 싱가포르에서 올 때보다 싼 편이다.
싱가포르 입국 때도 수월하게 통과됐다. 노인들이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안했다. 앞좌석의 젊은이에게도 까다롭게 따지는 것이 없었으니까.
90일 연장 때문에 조호바루에 갈 때는 택시를 이용하면 편하다고 하던 말이 맞는 것 같다.   오늘 비용은 모두 50$도 안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원말인가?
김노인이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듣고 놀랬다.
손자만 떠안은 할머니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 손자는 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애써 바동대다 가버리는 것이 인생이련가!?    

드리는 말씀 :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올렸던 글이 사정에 의해 늦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경로잔치(권양숙 난과 행운의 돌)’ 그리고 ‘교포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등 세 주제를 연이어 올린 것은 가정의 소중함과 더불어 노인의 현주소를 알리고자 함입니다.
가족 해체가 가져오는 폐해가 어떠한지, 자식들만 바라보며 아 온 어버이들의 외로움과 고달픈 삶을 조금이나마 조명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다음 편은 교통사고 이야기와 사고처리 정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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