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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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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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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에 숨은 슬픈 추억-

내가 아내의 주방 일을 돕기 시작한 경력은 어언 10년이다.
요리는 엄두도 못 내지만 설거지 하나는 프로다.
아내의 밥 짓고 찬 만들기가 끝나면 밥과 찬을 식탁에 가져다놓는 것부터 내 일이다.
우리 내외만 살 때는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쉽게 해결 되었다. 육류를 많이 먹지 않는 식습관 때문이다. 하지만 손자들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좀 까다롭다. 거의 때마다 육류가 밥상에 오르는데다 밥을 깨끗이 먹지 않아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설거지는 남은 반찬 가운데 버릴 것과 냉장고에 보관해야 할 것을 분류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의 설거지 철학은 최소의 물로 최대의 청결을 얻어내는 경제와 위생이다.
하루 세 끼는 물론이고 시도 때도 없이 먹는 간식에서 쏟아내는 설거지거리는 요즘 말로 장난이 아니다. 계란 후라이는 기본이고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들어가는 요리가 한 끼가 멀다 하고 식탁에 오른다.
기름기가 많은 그릇은 먼저 키친타월로 닦는 필수코스를 거친다. 특히 돼지고기 요리그릇의 경우는 바로 주방세제(퐁퐁 같은 것)를 사용하면 기름기를 지우는데 여간 힘들지 않을 뿐더러 물의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릇 헹구기다. 거품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건 헹군다. 이 때 만은 물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물을 절약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3단계 방법을 쓴다. 기름기의 유무와 그 정도를 가리고 그릇의 종류와 크기까지 따로 구분 지어놓고 단계적으로 헹구는 방법이다. 즉 작은 그릇부터 씻으면 그 물이 큰 그릇에 떨어지면서 절반은 자연스레  씻기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씻은 그릇을 건조하는 법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요체는 그릇 사이사이로 통풍이 잘돼야 깨끗이 빨리 마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놓는 요령이 필수다. 손쉬운 방법으로 다닥다닥 포개놓거나 작은 그릇 안에다 큰 그릇을 덮씌워 놓으면 마르지도 않고 위험하다. 무심코 꺼내다 떨어뜨려 깨기 딱 좋다. 적당한 간격과 위치를 잘 정해 놓으면 보기도 좋고 잘 마른다.
이렇게 꼼꼼히 챙겨도 소요되는 시간은 단 몇 분차이다. 그 짧은 시간도 인색한 우리들의 빨리빨리 대강대강 문화(?)가 늘 걱정스럽다.
이 콘도에는 멸균 건조기가 부착되어 있지 않다. 고온다습한 기후가 그릇 말리기에 더더욱 신경 써야 하는 이유다. 대나무 광주리나 나무 재질의 주방용품은 특히 곰팡이에 신경 써야  하는 목록이다.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는 가스레인지 청소다. 넘쳐난 찌개국물과 튀김기름으로 얼룩진 렌지청소가 항상 갈등의 소지다. 매번 닦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두고 볼 수도 없어 진퇴양난의 괴팍스런 존재다. 그렇기는 해도 시간투자 조금만 더하자고 마음 고쳐먹으면 언제나 반들반들하고 개운하다.
나는 주방의 청결도가 살림살이의 거울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나는 덜 편하고 깨끗한 주변을 선택하는 성격이다.
이러다가 보니 독한 세제가 손을 거칠게 만든다. 그렇다고 금방 땀 차이고 답답한 고무장갑을 사용할 수도 없다.
  집안에 먼지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까다로운 성격이 그야말로 힘든 삶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빨래 쪽으로 가보자.
밥 짓고 빨래하는 것은 아내와 나의 몫이 따로 없다.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 밥은 쌀 씻어 물만 잘 맞춰 앉히면 전기밥솥이 알아서 해주니 어려울 게 없다.
빨래는 좀 다르다. 미리 할 게 많다.  물빨래감인지 드라이크닝을 해야 될 것인지, 물 빠지는 세탁물은 없는지? 특히 카레의 노랑 물처럼 세탁기에서 잘 지어지지 않는 세탁물은 부분 손빨래 이후 넣어야 깨끗이 세탁된다.
빠는 것 못지않게 건조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혹시 이물질이 묻지는 않았는지 잘 살펴봐야하고 세탁물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손질도 미리 해야 한다. 그래야 다래미질 하기도 한결 쉽다.

특히 포개 너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건조대의 크기에 맞춰서 세탁물의 양을 조정하는 것도 지혜다. 더구나 습기가 많은 이곳에서는 매우 신경 써야 될 대목이다.
무엇보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녀석들의 운동화 빨기다. 이건 당연히 내 몫이다. 세탁기에 넣어 빨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깨끗하지도 않고 쉬 망가지는 것 같아 손으로 빨아야 마음이 놓인다.
아파트 외벽마다 길쭉하게 내민 대나무에 주룽주룽 매단 빨래 말리기는 우스꽝스런 볼거리다. 평균온도 26.7도에 평균습도가 84.3%인 고온다습의 기후환경이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내가 특허 낸 주방일이 있다. 바로 반찬 만들기다.
엄마들이 꼭꼭 지키며 보람을 느끼는 일상 가운데 첫 번째가 가족들을 챙겨 먹이는 음식 장만이라고들 한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은 그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우리 시대의 보편적 의식은 그랬다.
그 요리마저 아내의 손에서 뺏을 수는 없다. 그래서 아내가 요리할 때 내가 거들 수 있는 보조역은 재료 챙겨주기와 마늘 까기 정도다.
아내는 오늘 손자들이 좋아하는 닭다리 튀김을 시작했다. 속 깊은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듬뿍 붓고 렌지 불을 켠다. 닭다리에 드문드문 칼집을 내고 튀김가루에 골고루 버물면 튀김준비는 끝난다.
기술적 문제는 그 이후다. 열 세기의 정도와 튀김 시간에 따라 맛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무 기구도 없이 용케도 잘 맞춘다. 오랜 경험을 통한 노하우다. 이게 바로 엄마의  손맛으로 일컬어지는 것 같다.

손자들은 제 할머니의 닭튀김에 반한다. 한 녀석이 7개쯤 먹는 것은 기본이다.
기러기 할아비가 되고나서 부터는 녀석들이 좋아하는 닭튀김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궁리해도 아내의 맛을 낼 자신이 없어 시도조차 못하고 포기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은 설거지와 청소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다.
요리가 끝나면 아내는 TV시청과 인터넷 고스톱에 빠진다. 그렇게 스스로 시간을 보내주는 것만으로 고맙다. 내가 싱가포르에 가자고 졸랐으니까...
먼지가 두려운 컴퓨터와 화장대 그리고 식탁 책상 TV 거실장은 방바닥과 함께 매일 걸레질의 대상이다. 사시사철(또렷한 계절도 없지만) 팬티만 입고 청소를 하는 진풍경이 내가 나를 봐도 우습다.
이렇듯 몸에 밴 가사분담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1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어느 날이던가 아내의 손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손등에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아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당황한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 안하던 짓을 하니까 놀랍다는 눈빛이다. “여보, 손등이 왜 이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내 눈을 빤히 봤다. “왜 이렇게 거칠고 검버섯까지 피었느냐니까?” 재차 다그쳐 물었다.
아내는 대답이 없다. 나는 이내 입을 닫았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처럼 ‘창피해서 손을 못내 놓겠어.’라며 중얼대던 생각이 불현 듯 스쳤다.
  
- <예순이 되던 날까지도 마른 날이 없었던 아내의 손이다. 시집오던 그 다음날부터 개울물에 손을 담겨야 했다. 옛날 촌에서는 그랬다. 살갗이 찢어질듯 춥디추운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서 빨래를 했다. 독극물인 청산가리가 들었다는 시꺼먼 빨래비누가 오죽이나 피부를 망가뜨렸을까?
어디 그 뿐인가. 김장철에는 1km 거리에 있는 바닷가에 나가 배추와 무를 씻어 와야 했다. 이고 지고 가서 차디찬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를 서 너 시간, 손가락은 이미 남의 살이 되었고 손등까지 빨갛다 못해 검게 물들어 꽁꽁 얼었다.
5일 장날 역시 아내에게는 목이 내려앉는 날이다. 시장은 5리가 넘는 거리였고 장바구니는  모두 머리에 이고 와야 했다.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뚱보 아들 녀석까지 업고 다녔어야 했으니 그 고생을 어찌 글과 말로 표현하겠는가.
하루에도 네 댓 번씩은 물동이를 이고 오르내리기를 했다. 물동이는 오죽이나 무거웠던가.  이 모두 가냘픈 목이 감당해야 했었다.

시부모에다 아들 또래 시동생까지 여듭 식구의 맏며느리로 시집왔으니 어디 하나 손길 닿지 않는 데가 있었겠는가. 그 때 나는 몰랐다. 의례 다 그러는 줄 알았다. 그놈의 체면 때문에 대놓고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생각해 보면 참 미련하고 무심했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표현은 망측하고 상스런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남편과 함께 지내는 신혼생활이 길었더라면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라도 되었겠지만 불과 섣달 만에 나는 객지로 떠나야 했다.  
 알게 모르게 흘린 눈물은 그 얼마나 많았을까.
시원찮은 남편에게 실망 또한 얼마나 컸을 것이며 자기들밖에 모르는 시식구들에 대한 서운함도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애틋이 보듬어 주지 못했던 젊은 날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던 빨래거리가 아내의 손을 망가뜨린 원흉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지나간 세월을 어느 장사가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설거지 역사는 이토록 아픈 사연에서 시작됐다. 물로 하여금 망가진 손인데 어찌 또 물에 담그게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반세기 전에 불과하지만 공간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만큼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버턴 하나면 만사 OK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뒤돌아보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60년대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하나 의지했던 부부의 믿음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해도 여편네 하나 굶기지는 않겠다며 예쁜 딸을 주셨던 장모님의 통 큰 결정도 열심히 살게 했던 동력이었다.
때때로 남산 꼭대기에 올라앉아 세상을 한탄하던 나에게는 젊고 예쁜 아내가 있어 힘이 되었고 언제나 마음만은 부자였던 젊은 시절이었다.
지금도 나의 휴대폰 화면에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라는 슬라이드 글귀와 함께 아내 사진이 턱 버티고 있다.
MP3에도 담고 다닌다. 속죄의 마음 못지않게 진정 사랑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무척 속상해 하는 아내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무리 힘들고 살기 어려워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성품인데 몹시 심란해 하는 게 심상찮다. ‘친구들의 피둥피둥한 손등’에 열등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예전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예사로운 일인데...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는가?
평소 ‘너는 왜 늙지도 않느냐....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젊어 보인다.’는 둥 듣기 좋은 말만 들어왔던 터니까 그럴 만도 하다. 아내가 화나고 울적할 때 가장 힘들고 괴로운 사람은 바로 나다. 오로지 세 아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만 일생을 바친 아내이기에 가슴이 미어진다.
돈으로는 도저히 계산되지 않는 아내에게 진 이 엄청난 빚을 오늘내일하다가 끝내 갚지 못한 채 싱가포르까지 온 것이다.
이뿐인가 “잔인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아들놈들, 그리고 나이 먹어 별 볼 일 없는 이 영감탱이가 나이든 여인네의 가슴을 얼마나 공허하게 할까?”라는 생각에 나는 언제나 죄인이다.

눈 깜짝할 사이 서녘에 걸쳐버린 아내의 인생을 무슨 재주로 되돌린단 말인가.
어찌 청소와 설거지 정도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 여보! 이제 나의 손도 무척 마르고 까칠해 졌구려. 그렇지만 달랑 두 식구의 설거지보다 당신과 함께하던 여럿 식구의 설거지가 더 좋았다오. -

오늘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힘들 아내의 무사회복을 빌고 또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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