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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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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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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28
본문
평소 품고 있던 나의 교육관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내가 지향하는 교육관을 요약하면
첫째는 맞춤형 교육이다.
두 번째는 상생의 경쟁이다.
서론은 이렇다.
먼저 교육정책의 부재를 들고 싶다.
해마다 바뀌는 입시제도는 늘 혼란의 중심에 있다. 과외를 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은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은 물론 학생들을 학습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가로 맞는 고질적인 병폐다.
‘튼튼한 체력은 건강한 정신을 만든다’는 격언을 신봉하는 나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나라 교육정책이나 제도는 제로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한다. 교육은 곧 국가 존립과 번영의 기틀이자 잣대다.
그럼에도 5년짜리 정권의 정치술수나 상황에 맞추는 대중인기영합의 땜질 교육정책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학부모 학생 할 것 없이 정치적 볼모가 되어버렸다. 늘 불안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교육정책의 요체는 일관성과 지속성이다. 이는 곧 교육의 기본질서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교육은 이 기본마저 지키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왜 그런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나의 대답은 학부모와 정치권 모두에게 있다고 감히 말한다.
안으로는 학부모들의 극한적인 이기심이다. 내 자식이 진학하고 출세하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강박관념이 당국의 정책을 흔들고 교육현장을 훼방질 하고 있다.
교육주체인 학부모 학생이 자기들의 유 불리에 따라 교육방향을 좌지우지 하려한다.
자녀의 능력은 무시한 채 일류지향성의 충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학을 가야 한다. 그것도 일류대학이어야 식성이 풀린다. 그러다보니까 막무가내식의 과외를 해야 하고 반칙과 부조리가 횡행한다.
중학생들은 밤 10시까지 학원을 옮겨 다닌다고 한다. 고등학생은 도시락을 4개씩 가지고 다니면서 점심, 새참, 저녁, 밤참을 먹는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심야 학원수업이 금지되어 있어 인근 경기도로 야밤 과외 원정을 간다는 뉴스를 봤다. 이게 어디 정상인가?
비정상적 교육이 결국 역주행이라는 희한한 현상을 낳기도 한다. 4년제 일류대학교를 나왔어도 취직이 안 돼 2년제 전문대학으로 유턴하는 현상이다. 이 얼마나 허탈하고 낭비적인 역주행인가.
그렇다고 우리의 교육열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견인차가 유별난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하는 본질은 이 시대에 걸맞은 교육개혁의 필요성에 있다.
백년은 고사하고 해마다 바뀌는 대중주의(포퓰리즘)의 정책은 청산되어야 한다.
진정 백년을 내다보는 21세기형의 정책과 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
지금의 주입식교육과 평준화 정책은 한참 지난 세기의 유물에 불과하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은 기발한 창의성의 배양과 무한한 도전정신의 함양이라 정의하고 싶다.
점수받기 기계가 아니라 기계를 만드는 머리가 필요한 시대다. 수만 가지의 직종에 골고루 배치되어 자신만의 특기를 한껏 발휘해야 할 시대다.
21세기 문명은 초당 30만Km라는 빛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발전하며 진화하고 있다.
나는 유년기 때 보름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는 동요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청년기 때 동화는 여지없이 부셔졌다. 인간이 달에 갔다 온 것이다. 그리고 노년엔 자동차로 달을 관광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날도 멀지않았고 억겁의 화성 비밀도 알게 될 것 같다.
농본시대에서 지식시대로 단순노동에서 다양화시대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기 하나면 못하는 게 없는 첨단문명시대다.
정보기술(IT)의 총아로 자리매김한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전화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게 불과 반세기 전이다.
불과 한 인간의 수명선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상들이다.
이렇듯 컴퓨터는 고사하고 휴대전화기 하나면 언제 어디서나 못 찾을 정보가 없다.
무엇을 왜 외우기만 해야 하나? 길(활용방법)만 알면 자료면 자료, 지식이면 지식 척척 해결하는 요술 상자가 있는데 말이다.
이렇듯 학자의 길이 아니라면 기초학문에 목을 맬 이유가 없게 됐다.
인간에게 어찌 평준이 존재하는가? 평준은 지향할 수 있는 이상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싶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다. 제각기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다른데 어찌 똑 같은 수준으로 만든단 말인가? 물론 골고루 혜택 받는 교육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어불성설이다. 위정자들은 대중들의 귀에 고소한 말만 골라서 하고 있다.
이 결과 우리나라 교육은 방향타를 잃고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고치기는 힘들게 되어있다. 다수의 학부모들이 경쟁은 안 된다고 반발한다. 과외를 부추겨 빈부격차를 벌린다는 이유다. 빈부격차는 이미 벌어질 때로 벌어졌고 과외경쟁 또한 갈대로 갔는데도 그런다.
무늬만 근사한 ‘평준화’의 고삐를 잡고 있는 게 그래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평준화라는 이름의 무책에 우리들도 한몫 거들고 있는 자기모순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창의력과 독창성을 가로막는 암 덩어리를 안은 채 말이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교육경쟁은 결국 계층 간의 반목과 갈등의 부작용만 있을 뿐이다.
세계 최고의 치열한 교육열을 가졌음에도 2008년 세계 대학순위 50위에 겨우 턱걸이 하는 아이러니는 왜서일까? 바로 교육정책 부재에 있고 경쟁력 없는 제도에 있다는 반증이다.
‘인생이란 그 자체가 경쟁이다.’ 자녀교육도 인생의 삶도 경쟁이라는 기본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불법과 반칙이 없는 선의의 경쟁이 되어야 하고 서로 인정하고 도와주는 상생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투명한 경쟁 룰이 있어야하고 그 룰을 지켜 나갈 교육주체들이 기꺼이 수용하고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평소 사람은 타고난 소질에 따라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이의 재능과 역량에 따라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고 그에 합당한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예컨대 학문의 길을 가야할 아이, 기술이나 예능 쪽으로 가야할 아이, 농사를 지을 아이, 노동으로 승부를 걸어야 아이 등등...
대안으로서는 중학교까지는 인성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최대한의 기초학습을 읽히고 고등학교부터는 진로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교육제도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맞춤교육’이다.
지금과 같이 자기의 재능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일류대학 또는 4년제 대학을 나와야 만이 사회진출을 할 수 있고 출세도 한다는 낡은 고정관념이 하루속히 타파되어야 국가도 개인도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주장을 펴고 있는 내가 바로 지난날 몹쓸 일류병의 당사자였다. 그리고 그 피해자가 나의 큰 아들이다. 일류가 아니면 못살 것 같은 고정관념이 아들의 소질을 뭉개버렸고 그 결과는 일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깊은 회한으로 남았다.
지금 우리는 해마다 왔다 갔다 하는 널뛰기 입시정책과 끝이 보이지 않는 과외열풍으로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적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이 골병만 들고 있는 희한한 판국이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경제 논리뿐만 아니라 교육 역시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득을 내야 한다. 이는 곧 인재와 인력의 균형 잡힌 수급이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선택하고 그 선택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길 말이다.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으로서는 고등룸펜의 양산에서 벗어날 수 없고 3D현상을 극복할 수도 없다.
청소하는 분들이 큰 대접을 받는 사회, 무거운 짐을 지는 노동자, 위험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가장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만 자리 잡는다면 굳이 몸에 맞지도 않은 옷에 탐을 낼 리가 없다.
지금 한참 교육개혁을 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중학교만 나와도 떳떳이 살 수 있는 사회 고등학교를 나오면 전문기술자로 대우 받을 수 있는 교육개혁이 하루속히 단행되어야 한다. 속도조정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미적거리다가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동반 침몰하는 대재앙을 목격할 수도 있다.
이토록 시급한 교육혁신을 하기위해서는 학부모부터 변화해야 한다.
무턱대고 공부만 1등하면 그만이라는 욕심과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기 아이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해서다. 기능인의 진로가 맞는다면 미련 없이 그 길로 유도하고 도와주는 것이 본인이나 부모 모두의 성공이라 믿는다. 학문에 뛰어난 아이가 있는가 하면 손재주 발재주가 특출한 아이들도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지 않는가.
본인의 재능과 적성에 딱 맞는 길만 찾아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바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보면 공부를 1등하고 일류대학을 나와도 사회생활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자녀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탐한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희생된 케이스다.
결론은 공부 1등이 꼭 삶의 1등도 아니고 행복의 보증수표도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들 돈도 필요할 때 쓸 만큼만 있으면 된다고 하듯이 지식도 필요할 때 활용할 만큼 쌓으면 그만인 것이다. 돈도 지식도 다다익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생결단을 낼 일도 아니다.
1등이든 일류학교 진학이든 할 수만 있다면 안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능력을 무시한 무리수를 두지 말자는 것이다. 그 무리수 때문에 부모 자녀가 함께 힘들고 상처 받는다.
성공과 행복의 길은 사방에 널려있다. 어느 길로 어떻게 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학력이 아니라 능력을 추구하는 사회가 진정 건강한 사회다.
두 번째,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고 축복하는 상생의 경쟁을 하여야 한다.
불행하게도 대답은 아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죽기 살기의 험악한 경쟁이다. 원인은 자신도 남도 인정하지 못하는 끝도 한도 없는 과욕 때문이다. 나를 알고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서로 보듬고 가야 한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사는 동물이 아니다. 도움주고 도움 받는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계다.
인생은 멀고 험난하다. 출발이 온전하다 해서 결과도 태평성대하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인생은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다고...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최종 목표는 성공과 행복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공이며 어떤 것이 행복인가?
지금 이 자리가 성공이고 행복이라면 그것이 바로 성공이자 행복인 것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건 어떤 위치(사회적 지위)에 있든 아무 조건 없는 자기만의 세계가 바로 ‘그 자리’인 것이다. 나의 행복론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비교하면 할수록 스스로 천박하고 비열해 진다. 그리고 얕잡아보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인간의 길은 사람마다 다르고 행복의 척도도 자기 나름인 것이다.
‘맞춤 교육’과 ‘상생의 경쟁’을 통해 알찬 교육 선진국을 만들어 보자는 순진한 제안이다.
드리는 말씀 : 쓰다가 보니 딱딱하고 시원찮은 논문조가 되었군요.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봅니다.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6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나의 교육관’이나 다음 6편의 ‘조기유학’ 역시 어디까지나 저의 사견과 이상에 불가합니다. 이런저런 의견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혹여 자녀의 교육에 보탬이 되는 대목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입니다. 이 글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과 아울러 좋은 대안이나 평소의 교육관을 서로 들어내 놓고 토론하는 한마당이 되기를 고대합니다. 우리 스스로와 사랑하는 우리들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글을 계속 읽어주시고 매회 마다 댓글과 추천으로 성원하여 주시는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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