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0
- [re]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4)
- 뚱땡 (piangca0213)
-
- 1,313
- 0
- 0
- 2009-03-25 20:15
페이지 정보
본문
> - 유학 결심과 싱가포르 선택 -
>
> 오늘은 2006년으로 되돌아 가볼까 한다.
> 아들과 며느리가 한 달여 전부터 손자들의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꺼냈다.
> 손자들도 외국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무조건이다.
> 우리 내외는 어리둥절했다.
> 그리고 10월에 접어든 어느 날 손녀와 손자를 싱가포르에 유학 보내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 이유는 이렇다.
> 제들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미국 캐나다 영국까지도 조기유학을 보냈다는 것이다. 제들은 우물쭈물하다가 맨 꼴찌라는 이야기다. 충동 유학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어디 우리가 철없는 아이들입니까?’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은연중의 경쟁의식과 영어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 의사 누구는 2학년 때 미국으로 보냈고 교수네 집은 캐나다로 보냈다는데서 부터 조기유학학부모들의 신상이 줄줄이 쏟아진다. 세계가 1일 생활권의 글로벌시대에 영어를 모르고서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은 물론이다.
>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치안상태가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전상 문제가 없고 거리도 가까워 자주 가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의 70%가 중국인이어서 영어보다 중국어를 더 많이 쓰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 세계의 언어가운데 사용하는 인구를 따지면 영어보다 중국어가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여건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시장은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교류의 파트너이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어를 모르고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 뭐니 뭐니 해도 조기유학을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의 조령모개 교육정책과 학생과 학부모를 혹사시키는 교육환경에 있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 이미 출국일정까지 잡혔고 하숙집도 마련되었다고 했다. 사실 그 당시 싱가포르에 대한 정보를 가진 주변 친지들이 없어 전적으로 유학원에 의지했던 모양이다.
> 한국촌만 알았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보 부족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
> 엄마나 아빠가 함께 갈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내외가 갈 수도 없는데 이제 겨우 열 살, 열 한 살짜리 아이들을 이역만리타국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우려했다.
> ‘아이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원론에 할 말이 없다. 사실 우리 내외야 무슨 대안이 있어 끼어들고 말리겠는가? 그저 걱정이나 하는 노인네일 뿐이다.
>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속도전이다. 그 흐름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낙오가 된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11살짜리 손녀가 나이에 비해 무척 당차고 똘똘한데 믿음이 갔다. 그리고 누나보다 한 살 적은 손자는 누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찰떡궁합이어서 둘이만 함께 있으면 별 문제 없으리라는 기대는 있었다.
> 문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이 없는 아이들만의 타국생활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 아들내외는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할 것이라고 애써 말하지만 하루에도 꼴 백번 보고 싶고 걱정되어 어떻게 버텨낼지 의문이다.
> 그 무엇보다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행여 아프고 다치기라도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참 혼란스럽다.
> 그럼에도 아들과 며느리의 과감한 결단과 이를 흔쾌히 따라준 손자들로 하여 싱가포르 유학은 시작 됐다.
> 산야에 붉고 노랑물결이 일렁이든 10월 중순이다. 이름 하여 조기유학길에 오르는 손자들의 크고 작은 보따리는 늙은이의 가슴을 헤집는다.
> 할아비와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 없는 녀석들은 마치 인근 바닷가에 소풍가는 양 그저 즐겁고 명랑하다.
> 공항으로 가는 승용차에서 할머니는 손녀 손자를 껴안고 애써 눈물을 감췄다. 공항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즐거워도 나오고 슬퍼도 나오는 눈물인가 싶다.
> 공항 대합실은 여행자들로 부쩍 거렸다. 손자들은 제들 안방인양 휘젓고 다니며 장난을 쳤다. 오늘만은 말리고 싶지 않아 보고만 있었다.
> 더디어 탑승수속이 시작됐다. 손자들과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의 시각이 코앞에 멈췄다. 코끝이 찡했다.
> 우리 내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잘 먹어야 한다. 누나 말 잘 듣고 동생 잘 돌봐야 한다. 많이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며칠 전부터 수없이 되풀이 했던 말이다. 더 할 말도 없다. 해봐야 귀에 들어올 리도 없을게다. 출입장 저 너머로 사라져가는 녀석들에게 마냥 손만 흔들어 댔다. 손자들도 크게 한 번 답례의 손을 흔들며 만리 길 싱가포르를 향했다.
> 우리는 되돌아오는 승용차에서 한 동안 침묵했다. 아내의 눈시울엔 가는 이슬이 송송히 맺혀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내 손도 힘이 빠졌다. 꼭 이렇게 철부지 어린애들이 유학을 가야 하나?
> 도회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컸던 우리네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비록 먹고 입을 것은 없었지만 가족은 함께 살았다. 이별의 아픔도 몰랐다. 대국(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오순도순 정 나누며 허허 웃고 살았다.
>
> 일주일 뒤 아들은 돌아왔다. 아내는 다급했다. 아이들은 어떠냐고? 아무 생각 없이 잘 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여전히 불안 초조한 것을 어쩌랴.
> 아들 셋에 손자가 다섯 있지만 열 살짜리 이 손자는 유별나다. 태어나서 여섯 달 만에 우리 내외의 손에 컸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우리 집에만 오면 꼭 할머니 품에서 잤다. 우리에게 대한 애정 표시도 남다르게 정겨웠다. 그런 녀석이 할머니와 부모의 품을 떠나 말조차 통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애끓지 않겠는가.
> 글로벌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인가?
> 첨단 시스템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 이후부터 나는 끝없는 자문자답에 빠져들곤 하였지만 정답은 없다.
>
> 한 달 뒤 며느리가 돌아왔다. 주변에 연수를 핑계로 셋 달을 비운다고 말했던 상황에서 의외다. 이유는 아이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 자기시간을 헤비하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 무엇보다 하숙집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자식처럼 좋아하고 제들보다 더 잘 챙겨주어서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더라고 했다. 손자들도 스스럼없이 금방 따르고 그 집 두 딸도 녀석들을 무척 예쁘게 여겨서 마음 편했다고도 했다.
> 가장 미덥고 고마운 것은 하숙집 주인이 자기 방을 내주고 아주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를 한다는 것이다. 잠꼬대가 심한 녀석들이 밤새도록 에어컨을 켜고 자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한시름 덜었다고 했다.
> 정말 감사하고 축복받을 분들이다.
> 집사람은 ‘복 많은 녀석들이라 어디를 가나 귀여움을 받는다’며 한참 자화자찬이다.
> 국립초등학교의 학기 시작이 1월이라서 당장 입학은 할 수 없어 우선 한국인 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고도 했다.
> 헤어질 때 한국에 되돌아가겠다며 울지 않더냐고 물었더니 공항에 배웅 나와서도 싱글벙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는 듯 손만 흔들더라고 했다. 우리 내외는 ‘그 녀석들 아무래도 유학체질인가보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라고 다 기쁜 웃음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달래는 자위의 한숨이라고나 할까. 아들과 며느리 역시 남모르는 눈물깨나 흘렸을 것이다.
>
> 이때부터 정액제 국제전화는 불이 났고 화상 인터넷 전화도 시도되었다.
> 두 달 뒤 제들 애비가 싱가포르에 다시 가서 두 녀석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했다. 영어 때문에 손녀는 3학년에 손자는 2학년에 한 학년씩 낮춰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둘이 같은 학교에 함께 다니지 못하고 각자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 초등학교부터 등급이 있는 싱가포르 국립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영어와 수학이 수학능력측정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이다.
> 손녀는 유치원 때부터 영어공부를 하였지만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학원에 서 너 달 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합격하여 학교에 다닌다고 하니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 하지만 걱정거리는 여전하다.
> 입학은 하였다지만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배울 수가 있을까? 피부색조차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활발히 생활할 수 있을까?
> 오누이가 같은 학교에 다녀도 서로 큰 의지가 될 터인데 그마저 안됐다니 금심이 클 수밖에 없다.
> 손녀 손자의 조기유학은 이렇게 출발되었고 그 이후 과정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 <그 이후 이야기는 차후 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
>
>드리는 말씀 : 토요일에 올릴 예정인 5편은 ‘나의 교육관’과 조기유학 붐을 접목시켜 논쟁거리로 띄어볼까 합니다.
>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