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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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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의 몸살림 이야기〈66〉두뇌 ①
뇌수인가, 흉수인가?
지금 세계적으로 뇌사 인정 여부를 놓고 논쟁이 치열하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어떤 상태가 되면 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옛날에는 심장이나 폐가 작동하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심폐사이다. 심장이 멎으면 피가 공급되지 않으니 모든 기관이 작동되지 않을 것이고, 폐가 멎으면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니 심장까지도 움직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심장이나 폐가 멎으면 피가 공급되지 않으니 뇌도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이렇게 볼 때에는 죽음의 상태를 정의하는 것이 간단했다. 숨이나 심장까지 멎으면 뇌가지 멎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간단하게 잘라서 볼 수 있었다. 심장이 멎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럴 때에는 사람의 생명은 심장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심장이 멎으면 죽는 것이니 생명은 심장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하게 보는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의학의 기술이 발전하면서였다. 뇌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뇌사(brain death)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거의 없던 뇌사자가 많이 생기게 됐기 때문이다. 예전에 뇌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뇌사자는 대개 머지않아 심폐기능이 떨어져 사망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심폐 소생술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판단기준을 일거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에서 널리 보급된 생명연명장치는 인위적으로 심장의 박동과 호흡을 계속하게 함으로써 시체의 부패를 막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이른바 살아 있는 시체의 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현대의학은 필연적으로 심폐기능의 정지로 이어지는 전(前) 단계로 뇌기능의 불가역적 정지를 죽음으로 간주하는 뇌사를 죽음의 판단기준으로 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이을상, <죽음과 윤리: 인간의 죽음과 관련한 생명윤리학의 논쟁들>, 백산서당, 2005, 66쪽에서 인용)
여기에는 장기이식의 문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뇌사자는 어쩌다가 소생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사망에 이른다. 뇌사자를 사망으로 판정하면 싱싱한 장기를 빼내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시킬 수 있다. 그러면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악화된 환자를 살려낼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죽어 있는 사람이니 사망 판정을 내리고 그 살아 있는 시체의 장기를 이용해서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사람을 살려내자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이 존엄한 것은 그 사람이 사회적 관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때인데, 뇌사자는 막대한 자원을 낭비하면서 가족과 사회에 피해를 입히게 되니 그 사람의 존엄성을 위해서라도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개 의사들을 중심으로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진보적인 입장이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종교계를 중심으로 만만치가 않다. 우선 드물기는 하지만 화생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 아니고, 더군다나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생명연장 장치를 떼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고, 신이 내려준 생명을 고의로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신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로서는 보수적인 입장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진보나 보수의 입장을 떠나 죽을 사람을 억지로 살려 놓는 것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다 자연사(自然死)에 이를 사람이었는데, 현대의학이 억지로 생명 아닌 생명을 연장해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명연장 장치를 이용하지 않았을 때 살아남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명(命)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이니까 살려야 하지만, 이미 생명연장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연(自然)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인공(人工)의 기술이 발달해 사람의 죽음도 부자연(不自然)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종교인 등 뇌사를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말자는 분들의 생각도 존중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뇌사자의 장기를 적출해서 다른 사람에게 넣어 주자는 의견에는 다분히 상업주의도 한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뇌사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죽음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어느 쪽으로 가느냐에 달려 있을 분이다. 필자는 우리 몸에서 두뇌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뇌사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다음 글은 몸살림운동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2005년 12월 22일자로 올라왔던 것이다. 몸살림운동에서는 두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조금 길지만 댓글까지 함께 그대로 인용해 본다.
제가 생각해 본 척수가 인체의 중심이라는 증거
아래에 쓰는 글은 단지 제 추측입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뇌를 인간의 중심으로 봅니다. 인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은 기본적으로 뇌의 통제를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몸살림운동에서는 뇌가 아니라 척수가 중심이라고 봅니다. 척수만으로는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이 부족하여 뇌라는 보조기관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컴퓨터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척수는 중앙처리장치이고 뇌는 하드디스크나 그래픽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뇌와 척수 중에 어느 것이 중심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둘을 분리했을 때 어느 쪽이 활동을 멈추는지 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도에 여행을 갔을 때 어느 사원에 갔었는데, 마침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물은 염소 서너 마리였는데 모두 목을 자르는 방식으로 즉석에서 도살되었습니다. 동물을 도살하는 장면을 처음 본 것이어서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목이 잘린 즉시 머리 부분은 동작을 완전히 멈추어 버린 반면, 몸통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거의 20초 동안 계속 움직였습니다. 뇌가 중심이 되어서 생명체를 통제하는 것이라면 뇌가 분리된 상태에서 몸이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오징어의 다리를 잘라 보면 꽤 오랫동안 계속 꿈틀거리고, 사람의 손가락도 잘린 후에 잠시 동안 꿈틀거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보인 염소의 움직임은 단순히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뛰어서 도망치려는 것 같은 동작이었습니다. 네 다리의 움직임이 살아서 뛰어다닐 때의 동작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닭을 잡을 때에도 머리를 자르면 닭이 바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놈들은 머리가 잘린 상태로 도망쳐 버리기도 합니다. 뇌가 닭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중추라면 머리가 잘린 상태에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아주 신기한 글을 보게 되었는데,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목이 잘린 닭이 머리가 없는 채로 1년 6개월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누가 장난친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난이 아닌 것 같더군요. 기네스북에도 오르고 TV에도 몇 번 나왔다고 합니다. 아래는 제가 본 글의 전문입니다.
1945년 9월 10일, 미국의 콜로라도주 푸루이타시에서는 양계장을 운영하던 로이드와 클라라 올슨 부부가 농장의 닭 중 30여 마리를 잡아 시장에 팔기 위해 5~6개월간 자란 닭을 도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닭장 앞에서 닭을 잡던 로이드는 닭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러던 닭 중 수탉 한 마리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본 그는 문제의 수탉을 잡아와서 함께 도살하려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동물들을 도살하며 한 번도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던 로이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닭을 본 뒤 목을 내리쳐 잘랐고, 목이 잘라진 닭이 주위를 마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본 로이드는 문제의 닭이 곧 죽을 것으로 알고 도살 된 닭들을 바구니에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수탉을 바구니에 담으려 했던 로이드는 기괴하게도 닭이 머리를 남겨두고 어디론가 없어져 버린 광경을 목격하였고, 깜짝 놀라 머리가 없는 닭을 찾아다닌 로이드는 문제의 닭이 살아 있는 닭처럼 다른 수탉들 사이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문제의 닭을 잡아 도살하려 한 로이드는 아무래도 자신이 벌인 일이 크게 잘못된 것 같아 닭에게 깊은 사과를 하였다고 하며, 그때부터 그는 닭에게 직접 모이를 먹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목이 잘려 나간 뒤 크게 열린 목구멍에 사료를 직접 손으로 넣어 준 로이드는 며칠 뒤 죽을 것으로 추측되었던 닭이 며칠이 지나도, 몇 주가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모습을 본 뒤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후 소식을 듣고 로이드의 농장을 찾아온 흥행사 호프 웨이드는 "닭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돈을 벌자"는 제안을 하여 닭에게 마이크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서커스와 동행하며 머리가 없는 닭인 마이크를 볼 사람들에게 25센트의 돈을 받기 시작한 뒤 한 달에 무려 4,500불이 넘는 돈을 벌기 시작하였습니다.
로이드의 농장에서 나온 머리 없는 닭 마이크가 목돈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 전역의 농부들은 모두 도끼를 들고 자기 농장 닭의 목을 내리치기 시작하였고, 유일하게 마이크와 똑같이 목 없는 삶을 살 수 있던 럭키라는 이름의 닭은 11일이 지난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7년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던 마이크는 목구멍에 로이드가 모르고 주사기를 꽂아둔 채 잠이 들어 켁켁거리다 숨을 거두었다고 하며, 닭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이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까 봐 신문에 "닭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 소식을 보도하게 하였습니다.
1949년경 마이크가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한 로이드는 자신의 인생에 다시는 동물을 도살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입장을 발표하였고, 1980년 임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그는 자신이 마이크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에게 깊은 사과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한 뒤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 콜로라도주의 푸루이타시는 머리 없는 닭인 마이크가 도시의 심벌이 되었다고 하며, 매년 푸루이타시에서는 머리 없는 닭 마이크와 관련된 행사를 열어 기적으로 여겨진 닭의 삶을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도 있더군요. http://www.miketheheadlesschicken.org입니다.
머리가 잘린 상태로 2년이나 생존했다는 것은 뇌가 중추신경계의 중심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은 앞에서 예를 든 염소나 닭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사람도 동물의 한 종이니 뇌가 아니라 척수가 중심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OO : 그래요. 일반적으로 뇌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몸살림을 하면서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척수 중에서도 흉수 부분이 중요하다고 하죠. 그 닭의 경우에서 보듯이 전 인간의 의식의 중심적인 센터가 몸살림의 시각처럼 뇌가 아니라 가슴 부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없어진 닭에게도 가슴 부위에 생명의 의식이 계속 있었을 거라 추측됩니다.
최OO : 일반인의 99%, 아니 99.99%는 뇌가 중심이라고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도 물론 척수가 더 중심이라는 무영 선생님의 말씀에 색다른 관점이라고만 보았을 뿐입니다. 머리 잘리고 껍데기까지 벗겨지고 심장, 내장도 모두 발라진 뱀도 가운데를 묶어 들고 있으면 머리 쪽을 위로 올리면서 꿈틀거리곤 합니다. 토막 내서 물에 씻다가 놓치면 그 토막도 헤엄쳐 도망가기도 합니다. 이건 제가 보릿고개 시절에 어른들 하는 걸 옆에서 직접 본 경험입니다. 무영 선생님은 척수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어떠한 계기로 확신하게 되신 건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다만 진화과정 상의 발생기관의 선후 관계만 말씀하시죠.
이OO :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뇌사의 문제도 이와 관련시켜 생각해야겠지요. 뇌는 활동을 중지했어도 흉추가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지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흉추에서 두뇌로 가는 신경이 막혀 있는 것인데, 그 신경이 뚫리면 다시 과거를 기억하게 되겠지요. 진화의 과장에서 선과 후가 있다는 것은 그 전의 것이 그 다음의 것보다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우선이라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흉수 이후에 다른 중추신경계가 발생한다는 것은 중추신경계를 가진 동물에게 있어 생명현상은 먼저 발생한 기관이 중심이 돼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최OO : 척수가 중요하다는 건 몸살림에서만 그렇게 이해하기로 하고 이 문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이 문제는 생명과 영혼의 문제까지 건드리는 걸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영혼의 그릇이라고 믿었던 과거에 심장이식술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도 엄청났는데, 이제 그 영혼의 자리가 뇌로 옮겨져 뇌사를 사망으로 보는 현제에서 더 이상 나아가면 그 영혼이 갈 곳이 없게 될 듯해서입니다. 그리 된다면 영혼의 존재 여부까지 논란의 와중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저의 노파심입니다.
권OO : OO군의 생각에 경의를 표하네. 몸살림을 설명하려면 뇌와 흉추 1~7번 얘기를 않을 수 없었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음이야. 고마우이.^^
머리 없는 닭 마이크가 어떻게 1년 6개월씩이나 살아 있을 수 있었는지 필자도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도 어쨌든 콜로라도주의 프루이타시에서 운영하는 정식 홈페이지를 보면 "Mike the Headless Chicken Festival"이라는 이름의 마이크를 기념하는 페스티발이 매년 5월 19, 20 양일에 걸쳐 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페스티발을 안내하는 초기화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The Amazing, true story of this famous fowl dates back to September 10, 1945 when Mike, a young Wyandotte rooster, was about to become the dinner of Fruita, Colorado, farmer Lloyd Olsen.
With a sharp ax in hand, Mr. Olsen firmly held Mike, preparing to make the bird ready for his wife Claras cooking pot. Mr. Olsen swung the implement, thereby lopping off poor Mikes head. Mike shook off the event, then continued trying to peck for food.
Mikes will to live remains an inspiration. It is a great comfort to know you can live a normal life, even after you have lost your mind. Thanks, Mike!
1945년 9월 14일, 이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인 와이언도트 종의 젊은 수탉은 막 콜로라도주 프루이타시의 농부인 로이드 올센의 저녁 식탁에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이 새를 그의 아내인 클라라의 냄비 속에 집어넣기 위해 올센은 잘 벼려진 손도끼를 손에 들고 마이크의 목을 꽉 붙잡았다. 올슨이 도끼를 휘두르자 불쌍한 마이크의 목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마이크는 그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먹이를 쪼아 먹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마이크의 삶에 대한 의지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격려해 주고 있다. 정신이 나간 후에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위안이 되는 일이다. 고맙다, 마이크!
이 글을 보면 마이크가 농부 주인을 빤히 쳐다보았다는 얘기는 없다. 그래도 어쨌든 이 초기화면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이 나간 후에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위안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두뇌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머리를 자르면 정신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나간 후에도 마이크는 삶의 의지를 잃지 않고 무려 1년 6개월이나 살아 있음으로 해서 "오늘날에도 우리를 격려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뇌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없으면 정신도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가 그렇든 말든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전에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룰 때 얘기했듯이 인간의 두뇌는 고도로 발전해 있다. 수많은 경험을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비교하면서 개념을 만들어 내고, 다시 만들어 낸 개념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사람은 유일하게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동물이다. 두뇌가 이런 작업을 하는 당사자이다.
그러면 이런 작업을 하도록 일을 시키는 주인은 누구인가? 두뇌 스스로 알아서 이 작업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두뇌는 명령을 받아서 작업을 하는 것일 뿐일까? 앞의 인용문에서 척수는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중앙처리장치(CPU)이고 두뇌는 하드디스크나 그래픽카드라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척수라기보다는 흉수, 그중에서도 흉추 3, 4, 5번에 들어 있는 흉수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CPU는 "컴퓨터 시스템 전체를 제어하는 장치인데, 다양한 입력장치로부터 자료를 받아 처리한 후 그 결과를 출력장치로 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제어하고 조정하는 일을 수행한다. 모든 컴퓨터의 작동과정이 중앙처리장치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한다"(네이버 백과사전, 중앙처리장치)고 한다. 여기에서도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것이 CPU라 하고 있다. 어쨌든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일 게다.
필자가 전에 다른 방식으로 비유해 흉수는 대통령제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대통령에 해당되고, 두뇌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 조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대통령이 중요한 정책을 결정해서 지시를 하면 공무원 조직은 일사분란하게 그 지시를 따라 일을 해야 나라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잘 발생하지 않지만, 사람의 몸에서는 이 대통령과 공무원 조직 사이에 연결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흉추 3, 4, 5번의 흉수에서 지시를 하는데, 흉추 1, 2번과 경추가 틀어져 신경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때 현대의학에서 정신질환이라고 보는 증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또 불면증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 적도 있었다. 불면증이 올 때의 상태를 한번 보자. 잠은 오고 연거푸 하품은 나오는데, 머리는 더욱더 말똥말똥해지기만 한다.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고리를 물고 끝없이 펼쳐진다. 잠이 올 때 하품이 나오는 것은 이미 잠을 자기 위해 호흡의 방식을 산소를 덜 흡수하는 작은 호흡의 방식으로 바꾸었는데, 잠을 자지 않고 있어 많은 산소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하품을 해서 많은 공기를 흡수함으로써 부족한 산소를 공급받으려고 하품을 하는 것이다. 불면증이 심한 사람은 새벽 5, 6시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증세가 몇 년씩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불면증은 흉수에서 자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이 지시가 제대로 두뇌로 전달되지 않아 두뇌가 자기가 하던 활동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 등이 굽어 있고 고개 또한 굽어 있다. 등이 굽고 목이 굽어 있으면 근육까지 굳어 있어 흉수에서 뇌수로 가는 신경이 눌려서 약해지게 된다. 이것이 불면증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또 이런 사람은 모두 고관절이 틀어져 있다. 먼 원인은 결국 또 고관절로 귀결되는 것이다.
불면증이 있으면 좁쌀베개를 머리에다 베지 말고 목에다 베라는 얘기도 했을 것이다. 좁쌀베개는 유아들이 베는 작고 동그란 베개인데, 성인이 목에 베면 목이 뒤로 약간 굽는다. 원래 목은 뒤로 약간 굽은 형태가 정상인데, 등이 굽어 목이 1자로 돼 있어서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것이다. 목을 정상적인 모양새로 만들어 주면 흉수와 뇌수의 연결이 정상화되니 잠이 안 올 리가 없다. 7년 동안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L 정치학박사님은 좁쌀베개를 베고 나서 당장 그날부터 이 지긋지긋한 질환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이성의 문화?
예전에는 사람들이 심폐사(心肺死)를 죽음으로 믿었는데 요즘에는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하게 된 데는 문화 성향의 변화라는 배경이 있다. 과학의 발전에 의해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변해 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장기적인 문화 성향의 변화를 읽지 못하면 인간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된다.
이성의 문화는 서양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변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철학은 서양 철학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유럽 문화의 뿌리가 그리스•로마의 문화라면 유럽 철학의 뿌리는 그리스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 <요한복음>과 <신약>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로의 글은 이미 그리스 철학을 토대로 깔고 있었고(바울로는 그리스 태생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를 접하기 전에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유럽에서 기독교가 보편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도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을 토대로 해서 정립됐다.
이러한 경향은 데카르트가 합리주의 철학을 정초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됐다. 특히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경험론보다는 플라톤적인 본유(本有)관념의 철학에 의지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바로 이성을 가진 존재로 정초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유럽의 합리주의는 이 간단한 명제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명제를 한번 분석해 보도록 하자.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 이 명제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다 회의해 본 결과 그래도 회의할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회의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생각이 회의를 하는 것이지 다른 무엇이 회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다.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생각하지 않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내가 존재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생각하는, 바로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나, 바로 인간은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 중세 신본주의에서 근대 인본주의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신본주의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신이 나를 존재하게 했기 때문이다. 신과 관계가 없는 나라는 존재는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감히 인간은 신의 의지에 다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선포해 버렸다. 캘빈파의 박해를 피해 그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자유가 보장된다고 할 수 있던 네덜란드를 떠나야 했던 것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주장이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불경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결국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신본주의에서 떠나 인간의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합리주의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당시에는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이루어 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명제가 지닌 한계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우선 이분법적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는 생각하는 존재인 주체와 생각의 대상인 객체로 나누어진다. 모더니즘의 특색인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이로부터 탄생했다. 나의 내부에서는 생각하는 정신과 생각의 대상인 육체가 갈라지고 나와 남의 관계에서는 내가 주체가 되고 남이 객체가 되며, 국가를 놓고 보면 주체인 우리나라와 객체인 다른 나라가 갈라지고 인간과 자연을 놓고 보면 주체는 인간이 되고 객체는 자연이 된다.
주체가 자신을 실현하려면 객체를 지배해야 한다. 소위 헤겔이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주인이 되기 위한 치열한 인정 투쟁이 벌어진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해야 하고 내가 남을 지배해야 하며,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해야 하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심지어 실존주의 철학까지도 주체를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이분법 철학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논해진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으로 합리주의의 문제를 짚어 보도록 하자. 데카르트의 시대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생각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겠지만,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하는 내가 생각도 하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 것이다. 나는 생각해서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배가 고프니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한다. 몸에서 오줌이 마려우니까 화장실에 갈 생각을 하는 것이지, 생각을 하니까 오줌이 마려운 것이 아니다. 섹스 역시 몸에서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것이지, 생각을 해서 섹스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진화의 과정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몸 밖으로부터 필요한 에너지와 물질을 흡수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쓰고 남은 불필요한 물질은 밖으로 내보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암과 수가 결합해야 열매를 맺어 종이 끊어지지 않고 대를 이을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진화라는 것은 생명체가 변화된 지구 환경에서 이러한 생명활동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이루어져 왔다. 물에서만 살다가 뭍으로 올라와서도 살 수 있게 됐고, 더운 기후에서만 살 수 있다가 추운 기후에도 적응할 수 있게 됐으며, 본능에만 의존해서 살다가 지각작용이 발전하면서 경험에 의거해 판단을 하면서 사라갈 수 있게 됐다. 그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가 됐다.
그런데 이성은 두뇌에 소재하고 있다. 두뇌가 움직이지 않으면 생각도 할 수 없다. 생각해야 존재가 될 수 있으므로, 생각하지 못하면 비(非)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뇌가 멈추면 인간의 생명도 끝장이 난다는 사고가 나올 법도 하다.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자는 논거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사회성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든다.
데카르트의 합리론 철학 이후 근대라는 시대는 이성이 발휘되는 두뇌를 중심으로 사람의 몸을 보기 시작했다. 신본주의 시대 때에는 신의 뜻으로 인해 나타나던 현상이 인본주의 시대에는 두뇌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불면증에 대해서도 "뇌동맥경화나 고혈압으로 인한 뇌혈행 장애성 이외에 자율신경이나 내분비의 이상에서 오는 것, 정신병으로 인한 것이 많다"(네이버 백과사전)고 하여 두뇌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흉수가 중심이고 두뇌가 보조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의 단계에서 중추신경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두뇌가 발달하게 됐다든지 엄마 뱃속에서 태아가 계통발생을 반복할 때 두뇌가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흉수가 먼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썼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를 반복해서 얘기하지는 않겠다. 두뇌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한에는 약과 수술을 중심으로 치료를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건강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해 두기로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다음 회부터는 두뇌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질환이 실은 두뇌가 원인이 아니라 흉수와 뇌수가 잘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세라는 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겠다. 그리하여 두뇌 중심의 사고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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