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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디0312 (cb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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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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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의 몸살림 이야기〈56〉몸살림의 인체학, 고관절 ②
몸에 관한 패러다임의 변화=몸의 혁명
고관절이 틀어지지 않고도 몸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파서 필자를 찾아온 사람 중에서 대략 5~10% 정도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사람은 고관절을 교정하지 않고 바로 틀어져 있는 부분만 바로잡아 줘도 되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다 해 주면서 나는 왜 안 해주느냐고 섭섭해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하는 수 없이 고관절 큰돌기를 발로 치는 시늉이라도 내게 되는데 이런 해프닝이 그나마 필자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우리 몸에 생기는 이상은 대개가 고관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서양의 인체에 대한 주술(呪術)과 같은 잘못된 지식에서 벗어나 우리 몸에 대한 인식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은 플루트를 부는 여자 분이 찾아왔는데 이 분은 고관절은 전혀 틀어지지 않았고 허리도 확실하게 S라인을 그리며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등과 목이 몹시 아프고 눈은 침침하고 머리도 항상 찌푸둥하다고 한다. 플루트를 불 때 자세가 목을 왼편으로 돌리고 목을 약간 숙이게 돼 있는데 이런 자세를 오래 하다 보니 목근육이 경직돼서 목이 틀어지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플루트를 불 때 바른 자세는 아니지만 등을 구부려서 등 역시 틀어진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교정을 하다 보니 이 여자 분은 흉추 7번부터 시작해서 목뼈까지 틀어져 있었다. 이런 경우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등과 목을 바로잡아 주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본인이 2번 방석숙제를 통해서 등을 바로잡고 자주 도리도리 운동을 해서 목근육을 풀어 주어야 한다. 직업이 플루트를 부는 것이기 때문에 등과 목은 계속 틀어질 것이고 이런 경우 스스로 2번 방석숙제와 도리도리 운동을 꾸준하게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것은 일례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직업상 특별히 한 자세를 오래 지속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몸이 틀어져 불편한 경우가 많이 있다. 구둣방에서 일하는 어느 한 분은 베체트병으로 10년간 고생하고 있다고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 온 적이 있다. 필자가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고관절이 틀어져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구두를 만들고 수선할 때 등을 많이 구부리고 일해 왔을 것이므로 면역체계를 관장하는 자율신경이 갈라져 나오는 흉추 4, 5, 6번이 틀어져서 그럴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병에 걸리면 면역기능이 약해져 입안 또는 혀에 물집이 생기는데 하나가 생겨 터져도 한두 달간은 그곳이 몹시 쓰리고 아프다. 대개는 피곤할 때 생겼다가 한두 달 고생하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물집이 몇 개나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10년 동안이나 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면 그 당사자로서는 감내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분은 2번 방석숙제와 걷기숙제를 꾸준하게 하면 면역체계가 살아나 이 병에서 행방될 수 있을 것이다.
요새 직업과 관련해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이 모니터의 높이가 낮은 컴퓨터 앞에서 일하다 보니 등이 굽고 목이 1자가 되어서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다고 호소하는 경우이다. 이것을 가지고 전자파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들 하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전자파 때문이라면 전자파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사람의 몸을 괴롭히는지 밝혀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재 실정이다. 앞으로도 밝혀질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자파 때문에 그렇게 됐다면 전자파 차단장치를 한다든지 현재처럼 LCD모니터로 바뀌어 전자파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면 그런 증세 역시 현저하게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됐다는 얘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런 증세는 강도가 더 심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청객으로 찾아들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인지 원인을 찾아야 할 텐데 실제로 원인은 우리 몸 내부, 바로 자세에 있다. 그럼에보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하기는 외부에서 찾아야 돈을 벌기에 훨씬 유리할 것이다. 외부에서 찾아야 팔아먹을 물건을 만들어 내고 외부에서 원인을 찾은 것은 잘못된 것이니 처음 만들어 낸 물건으로는 분명히 안 될 것이고 안 되니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처음에 만든 것을 개선한다고 해서 또 다른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또 팔아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인을 내부에서 찾더라도 절대로 스스로 나을 수 있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전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이 안 되는 짓을 무엇 하려고 하겠는가. 약을 먹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야 돈이 된다. 그래야 제약회사도 살고 의사도 살고 약사도 살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본주의 세상은 실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 굉장히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잘못된 지식체계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믿고 물건 만들어서 팔아먹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학을 빙자하고 고고한 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이 스스로 낫는 원리는 처음부터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전에도 예로 들었지만 현대의학은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서 인슐린이 덜 생산돼서 당뇨병에 걸린다는 위대한 발명을 해 놓고도 그 다음 해결책에 가서는 방향을 틀어 버린다. 이미 그 안에 답이 다 들어 있는데도 그 답을 따라가면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인슐린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결국은 약장사의 길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필요한 만큼 인슐린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단순하게 신경이 잘 안 통해서 랑게르한스섬의 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일 뿐이다. 따라서 신경이 트여 전체로서 하나인 몸이 정보전달체계를 회복하게만 하면 인슐린은 정상적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이같은 방법으로 우리 몸의 장기가 정상적인 기능을 찾게 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어느 한 개개인을 탓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현대문명의 방향이 그쪽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개인이야 거대한 물줄기에서 보면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한 것이니, 물줄기가 흐르는 대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이 흐름 외에 다른 흐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흐름이 나타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자기의 지식체계를 깨고 다른 지식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체계를 수용할 때가 되어야 대세를 인정하고 순응하게 된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던 사람이 다른 패러다임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은 우선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의 잣대를 가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평가하게 된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과 작은 차이밖에 없으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차이가 너무 크게 나면 우선 거부감부터 들게 된다.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후기에 조선 사람들의 눈에 제사를 거부하는 기독교문명은 부모(父母)까지 부정하는 금수(禽獸)나 하는 짓거리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 문명을 금수의 짓거리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성리학적 유교문명을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지적하고 일찌감치 서양화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지 모른다. 조선의 개국은 불교적 패러다임에서 유교적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이전에 전통적 패러다임에서 불교적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는 부족연합 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떤 패러다임이 옳은가 그른가 따지지 말고 그냥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렇게 삶과 지식의 패러다임은 계속해서 수없이 많이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 동안의 경험에서 본다면 앞으로도 패러다임은 수없이 많이 바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못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 못마땅한 것을 마땅한 것으로 바꾸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의 배후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살아간다. 더 많은 인간 생명이 생명활동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기존의 지식체계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패러다임이 변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생명을 대신해서 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했다가 몰락했고 지금은 시장 지상주의자들이 오로지 시장만을 맹신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시장도 사람이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시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조차 대기업화되면서 무한정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약을 만들어서 더 많은 돈을 벌까만 궁리하는 제약회사와 어떻게 하면 더 비싼 기기를 만들어 더 큰 이윤을 낼까만 연구하는 의료기기 회사의 요청에 따라 현대의학은 점점 더 고가의 약과 장비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상태에서 인간 생명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따라가는 거꾸로 된 세상이 돼 버린 것이다.
다시 당뇨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오른쪽 고관절이 틀어진 상태에서 반대쪽으로만 힘을 주고 살아가니 흉추 11번이 오른쪽으로 틀어져 췌장으로 가는 신경이 눌려 췌장의 기능이 떨어져 있는 것이 당뇨병의 원인이다. 따라서 허리만 제대로 세우면 당뇨는 저절로 없어지지만 자기 허리를 세우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수술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약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의학에서 당뇨가 난치병이 되는 것은 약으로 허리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인데 약만 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을 먹어 보아야 허리는 세워지지 않고 그러므로 신경은 트이지 않는다. 약을 먹을수록 췌장은 인슐린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게 되고 점점 더 인슐린의 생산을 포기해 버린다. 이것이 약을 먹으면서 점점 더 당뇨가 심해지는 메커니즘이다. 점점 더 심해지면서 약에서 주사로, 주사에서 주머니로 더 많은 인슐린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이때 필자가 해 줄 수 있는 것 역시 고관절과 엉치, 흉추 11번을 바로잡아 스스로 허리를 세우도록 조금 도와주고 허리 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뿐이다. 그 방법은 몸살림운동 홈페이지를 통해서 누구나 돈 안 들이고 가져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당뇨에는 1번 방석숙제와 걷기숙제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이 허리를 세우는 수밖에 다른 해결의 방법이 없다.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한 달 안에 큰 효험을 볼 수 있다.
필자가 특별히 몸을 바로잡아 조금 도와주지 않아도 숙제만 꾸준하게 하면 당의 수치는 떨어지게 돼 있다. 설사 오른쪽 고관절이 들어맞지 않아 있더라도 허리를 세우면 당의 수치는 떨어지게 돼 있는 것이다. 오른쪽 고관절이 틀어져 있는 것이 근원적인 원인이지만 허리를 세우게 되면 직접적인 원인이 제거된다. 이로 인해 당의 수치는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당뇨를 본원적으로 잡으려면 오른쪽 고관절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리를 세워 일시적으로 당의 수치를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골반이 밑으로 말려 있기 때문에 다시 허리가 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자꾸 고관절을 강조하는 것은 고관절이 제자리에 있어도 직업이나 생활상의 이유로 몸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고관절이 제자리에 있어야 그 위나 아래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 본원적으로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뇨에는 일시적인 당뇨도 있는데 이는 오른쪽 고관절이 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허리가 굽었을 때 온다. 이런 경우는 다른 철에도 올 수 있지만 특히 겨울철이 되면서 많이 온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들이 몸을 웅크리게 되고 이때 허리가 굽으면서 오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경우 당뇨는 계절이 바뀌면 자연적으로 없어진다. 또 다른 철, 심지어는 무더운 여름철에도 갑자기 몸이 굽으면서 일시적인 당뇨가 올 수 있는데 이 역시 평상시의 자세로 돌아가면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스스로 낫는 원리에서는 교통사고나 추락처럼 외부로부터 그 원인이 주어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내부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원인이 내부에 있는 것이므로 그 내부의 원인을 제거해 줌으로써 그 탈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약이나 수술은 내부의 원인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증세를 완화시켜 주는 데 그치므로 근원적으로 건강을 보장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연치유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인간을 유약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고 본다.
인간은 이러한 약과 수술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무한한 능력을 죽이고 타력(他力)에 의존하게 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은 이제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무한한 능력을 살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간의 건강을 약과 수술로 돈을 주고 사고 팔 수 있다고 보는 기존의 패러다임은 이제 나의 건강은 나의 노력, 바로 내가 바른 자세를 가지려고 애씀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약과 수술이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다. 약과 수술이 필요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공장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다가 1주일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런 경우에는 전기 코드만 꼽으면 공장은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간다. 그런데 부도가 났다가 1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고 해 보자. 이미 기계가 녹이 슬어 있을 것이므로 대청소를 하고 다시 닦고 조이고 해야 할 것이다. 그냥 돌아가지는 않는 것이다.
몸이 틀어져서 병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자세가 제대로 잡히면 대개는 자연치유력으로 스스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오래돼 심각하게 진행된 사람은 자신의 자연치유력만으로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약과 수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숫자는 극히 적다. 그런데 지금의 의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몸이 아프면 무조건 약을 먹으라고 하고 심하면 수술하라고 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인데 무조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과 수술의 공해에서 벗어나야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구도 변해야 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개인의 노력에만 맡겨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각 문화의 산물인 앉거나 눕거나 할 때에 사용되는 도구, 즉 의자, 소파, 침대 같은 생활용구가 바른 자세를 갖는 데 유용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책상도 꼭 바닥에 대해 수평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닥에 대해 수평인 책상은 사람의 몸을 굽게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구둣방에서 일하거나 컴퓨터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동할 때에 노동의 도구가 가능한 한 바른 자세를 가지고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생활현장과 작업장 곳곳에서 도구를 바꾸는 몸의 혁명, 패러다임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님들이 침대를 만들 줄 몰라서 침대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 공부하거나 일하거나 앉아 있을 때 의자를 이용하지 않은 것도 의자를 만들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허리를 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건강법인데 허리를 세우려면 온돌방이 가장 좋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공부하거나 일할 때에는 맨바닥에 않는 것이 허리를 세우는 데 가장 좋은 방법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선비들은 공부할 때 서양 사람들처럼 몸을 구부리고 의자에 앉아서 하지 않았다. 손님이 와도 맨바닥에 상을 놓고 앉아서 접대를 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대머리가 많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서양 사람들처럼 구부리고 앉아 있으니 서량 사람들처럼 대머리가 많아지고 있다. 대학생들까지 주름살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우리 민족 고유의 건강법은 현 시대에 와서 너무나 홀대를 받고 있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수천 년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의 생활방식, 생활문화를 요즘에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고 있다. 서양 문화가 모두 우월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서양 따라가기에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민주주의나 인권, 과학기술 같은 것이야 좋은 것이고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좋지 않은 것도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서양 사람의 것이면 똥도 향기롭다는 듯이 무차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절박하게 서양화를 추진해 왔다. 앞서가 있는 이들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가 돼 왔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도 사람 꼴을 하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실제로 힘이 없는 우리는 일제에 강점을 당했고 선진제국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곤란했던 것은 배가 고픈 것이었다.
박정희 시대 때부터 추진된 조국근대화라는 것이 실은 서양화 중에서도 산업화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강했다. 사람은 우선 먹어야 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 보아야 배고픈 사람에게는 돼지에게 진주와 마찬가지일 뿐이다. 자식이 배가 고파서 울어대는데 세상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이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당장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산업화를 이루어야 했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까지 이를 이루고자 해서 멋있게 이뤄 냈다.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또한 이승만 시대 때 부패한 독재권력에 대한 항거로부터 시작된 민주화도 멋있게 이뤄 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남이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물론 서양의 민주주의 이념이 우리의 준거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에서도 소수의 나라만이 스스로 투쟁해서 만들어 낸 민주주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해서 만들어 냈다. 이제 한국의 민주화는 여러 유형의 민주화 중 한 케이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서양의 좋은 것을 우리는 배워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생겨났다. 서양문화가 우리보다 더 고급의 문화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서양문화를 고급문화로 인식하게 됐다. 조선이 거부한 패러다임을 현재의 우리는 따라잡아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서양의 모더니즘을 진리로 인식하고 열심히 뒤꽁무니를 따라왔다. 우리의 문화는 저열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부정돼야 할 대상이 돼 왔다.
모든 문명마다 자기만이 겪는 우여곡절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의 역사는 서양의 역사 시기구분에 맞추어 원시, 고대, 중세, 근세로 일렬로 정렬됐다. 특히 마르크시즘이 풍미하면서부터는 서양에서도 서너 나라를 빼고는 거의 없었던 자본주의 맹아를 이 땅에서 찾아내느라고 조선후기의 역사를 근대라는 색안경에 맞추어서 각색해 버렸다. 근래에야 실학이라는 용어가 자본주의 맹아를 발견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신조어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지만 말이다.
인문사회과학의 세계에서는 서양 학자의 이론을 들여와 우리나라에 적용시키는 것이 학자들이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자기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학자는 극히 드물다. 서양의 어느 학자가 어떤 얘기를 했는데 그것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서양 학자 뒤를 핥는 것으로 학문을 대신하는 시대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서양 학자의 학문적 업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학계가 서양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서양 사람이야 자기의 현실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현실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얘기는 하지 못하고 남의 얘기나 빌려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제발 한국의 학자들도 자신의 얘기를 하는 때가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데는 GDP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은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선진국이 되는 것이지 남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이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철학사는 서양철학사가 세계철학사로 둔갑해 있었다. 특히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인식에는 더 크게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오늘은 아시아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서양철학,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들 말고도 예술과 향수는 프랑스에만 있고 철학은 독일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는 일제 강점기도 미 제국주의 강점기도 전혀 아닌데, 경쟁력을 강화시키자는 핑계를 대면서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쓰자고 하는 부류까지 생겨났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많은 부수를 발간한다고 자랑하는 신문사에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하는 한심한 작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의 좋은 생활 전통도 점차 서양의 것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또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은 우르르 한 방향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결혼할 때 침대는 이제 거의 필수 혼수품이 되고 말았다. 침대를 장만하지 못하면 왠지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침대라는 것이 부피가 커서 큰 방이 아니면 들여놓기가 마땅치 않은 것인데, 그 좁은 방에 침대를 들여놓으니 서거나 앉아 있을 자리조차 없게 된다. 침대가 사람 몸 망친다는 것을 우리 조상님들은 잘 알고 있어 온돌방에서 생활했던 것인데 온돌방에 침대를 놓으니 망건 쓰고 양복 입은 격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침대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제발 푹신한 침대는 쓰지 말라는 것이다. 딱딱한 판자를 올려놓고 그 위에 요를 깔고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허리가 뒤로 굽고 가슴이 앞으로 움츠려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침대를 사용하는 폼이 안 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폼이 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그걸 선택하고 건강을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대로 다른 것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필자가 억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사항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몸이 비뚤어져 건강을 망치는 것도 자기 자신의 몫이다.
1980년대 중반쯤부터 보행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은 보행기 신세 한번 지지 않고 자라나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보행기 또한 우리 조상님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다. 인공(人工)을 좋아하는 서양에서 들어온 산물일 뿐이다. 아이를 보행기에 앉혀 놓으면 아이의 말썽을 많이 막을 수 있으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편할 것이다. 더구나 보행기에 줄을 묶어서 어느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해 놓으면 부모가 마음 놓고 다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아이가 세상에 나와 걷게 되기까지 1년여의 세월이 쓸데없이 있는 것인가를. 인간의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충분히 다 자라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다. 다른 포유류는 어미 뱃속에서 충분히 자라고 나서 세상에 나오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바로 걷거나 조금만 있으면 걷게 되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바로 두개골 때문이다. 두개골이 더 자라면 엄마의 치골과 좌골이 벌어져도 세상에 나올 수 없게 된다. 그 시점에 나와야 엄마도 살 수 있고 아기도 살 수 있게 돼 있다. 그래서 미리 세상에 나와 1년간 엄마 뱃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3개월 만에 몸을 뒤집고 6개월 만에 기게 되고 1년 만에 서게 되고 이후 아장아장 걷게 된다. 특히 이 기간 중에서도 기는 기간은 너무나 중요하다. 기면서 허리가 만곡을 긋게 되고 고관절이 튼튼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행기 위에서 지내게 되면 허리가 1자가 되고 고관절이 아주 약해진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시골 어느 한 구석에서나 할 법한 쭈쭈는 아이의 고관절을 강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허벅지를 잡고 꾹꾹 눌러 주면 고관절에 힘이 빡빡 가면서 고관절이 강화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는 해 주지는 못할망정 보행기에 태워 놓고 허리와 고관절을 망가뜨리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참으로 한심하게만 보인다.
그렇다고 필자가 보행기를 전혀 태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들은 부모님들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어서 보행기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함께 놀아 줄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전혀 태우지 말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다만 보행기를 태우면 아이의 성장이 빨라진다는 장사꾼들의 얄팍한 논리에서는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다. 성장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게 성장하기 때문에 이후 아이의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쯤은 알아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요즘 아이들에게 척추측만증뿐만 아니라 소아당뇨, 비만 등 어른에게나 나타날 성인병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보행기 덕분에 아이들의 허리와 고관절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가급적 보행기는 피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제 아이가 커 가면서 돈도 좀 모으게 되면 큰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러면 전에는 집이 좁아 들여놓지 못하던 것 하나를 자랑스럽게 들여놓게 된다. 우리 집도 이제는 중산층이 됐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말이다. 바로 소파다. 소파라는 게 면적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큰 거실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들여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큰 집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야 들여놓을 수 있다. 소파는 큰 집을 가졌다는 부의 증거물이 되기도 하고 드디어 서양적인 삶에 완벽하게 도달했다는 상징물이 되기도 한다.
소파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밑에 있는 TV를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다가 소파에 구부리고 쓰러져서 자면 자리를 옮기지 않고 자도 되니 이 또한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물건이 사람한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 침대보다도 의자보다도 더 몸을 굽게 하는 것이 소파인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 낸 앉을 것 중에서 가장 몸을 굽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소파인 것이다. 인간의 몸을 가장 크게 망치는 것이 소파다.
그냥 맨바닥에 앉아서 TV의 높이를 높여 놓고 보게 되면 허리가 쭉 서게 되는 것이다. 온돌방이라는 것이 맨바닥에 허리 세우고 앉으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소파를 들여놓으니 침대와 마찬가지로 망건 쓰고 양복 입은 격이 되는 것이다. 온돌방은 허리를 세우는 기능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이제는 난방기능만 하게 되었다. 차라리 서양처럼 벽난로 놓고 침대에서 사는 게 나을 정도까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잘못된 서양문화의 이기를 무조건 받아들이다 보니 사람들의 몸은 점점 더 굽어 가고 있다. 몸이 굽어 가니 현대병은 점점 더 심해지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도 잘못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선진국으로 가면 갈수록 당연히 현대병은 많아지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선진국에 현대병이 많은 것은 그들의 생활문화로 인해 그들의 몸이 굽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식생활 때문이라느니 운동부족 때문이라느니 하면서 엉뚱한 이유를 들고 있다.
점점 더 서양적인 생활방식에 익숙해질수록 점점 더 현대병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그 동안 우리의 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이에 비례해서 현대병이 많아졌다. 아직 우리의 의료비는 GDP 대비로 보면 유럽 선진국의 반 정도에 불과하다. 아직 서구화가 덜 된 덕분이다. 정말로 유럽이든 미국이든 갔을 때 그들의 몸을 한번 잘 보라. 우리보다 훨씬 더 구부정하게 굽어 있다.
그러나 우리도 이대로 가다가는 소위 선진국만큼 의료비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돈을 버는 사람들은 좋아할 일일지 몰라도 몸이 아픈 당사자로서는 죽을 맛이다. GDP 대비 의료비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만큼 복지가 완비됐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이보다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대단히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점점 더 서구화돼 가는 생활습관을 필자 혼자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암담할 뿐이다. 그래도 혹시 이런 추세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몸살림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의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전통적인 생활문화가 다시 복원되고 잘못된 서양적인 생활문화가 물러갈 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건강하게 살 수 있게 된다. 몸살림운동은 이것을 하자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일본에는 우리와 정 반대가 되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사는 집은 좁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파트라고 부르는 것도 20평 미만은 아파트(apart)라 부르고 그 이상이 되면 맨션(mansion, 대저택)이라 부를 만큼 이들은 좁은 집에서 살고 있다. 덕분에 일본 사람들은 가정에 침대를 들여다 놓을 공간도 없고 더구나 소파를 들여다 놓을 만한 거실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정집에서는 거의 침대나 소파를 이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냥 다다미방에서 무릎을 꿇는 전통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무릎 꿇는 자세를 불편한 자세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허리를 세우는 데는 양반자세만큼이나 유용한 자세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우리보다 일찍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의자 생활을 해 왔다. 의자 역시 허리를 뒤로 굽게 한다. 그러나 침대와 소파를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보다 허리가 더 반듯하게 서 있다. 일본이 세계 최장수국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유엔이 최근 발간한 <주요국가 평균수명 추이>에서는 15년 후에 우리나라가 일본에 이어 제2의 최장수국이 된다고 보고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지금처럼 급격하게 몸이 굽어 간다면 우리도 서양처럼 병이 많아질 것이고 어느 시점부터는 평균수명도 떨어지게 될 것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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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원님의 댓글
작은소원 (sengkang)원시 시대 사람들은 등이 굽었었고 진화되면서 펴졌다고 하던데 요즘 컴퓨터 등을 많이 이용하면서 다시 등을 굽히면서 일하는 기회가 많아 지는 것 같아요. 원시 시대 사람들처럼....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