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7
- 나를 알아가는 것, 우리를 알아가는 것
페이지 정보
- 기분 좋은 날 (aa2797484)
-
- 1,477
- 1
- 0
- 2009-08-31
본문
우리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수치스러운 일, 말 그대로 경술국치죠.
이제 거의 다 까먹긴 했지만 혼란스러웠던 조선 말기의 역사를 엄했던 국사 선생님의 얼굴과 함께 떠올려 보면 꼭 고종이 생각납니다.
아관파천, 강화도 조약.
고종에게 따라붙는 말 가운데 분명히 기억나는 것들입니다.
이 단어들을 읊조리면 자연스레 고종이 세계 정세를 읽지 못하고 치외 법권을 인정하면서 항구를 내줬다, 백성들이 피흘리며 싸울 때 혼자 살자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등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는 썩 달갑지 못한 설명들이 따라붙습니다.
저도 별 생각없이 고종이 소극적이고 어쩌면 아무 저항 없이 나라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했었죠.
오늘 제가 쓴 기사는 그런 저의 생각들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였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이신 이태진 교수님께서 외교사료관에 진작부터 보관돼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던 자료들을 공개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총 영사가 고무라라는 이름의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 5편인데요, 안중근 장군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3개월 되는 시점에서 보고서는 시작됩니다. (이태진 교수님의 번역을 쉬운 말들로 바꿔서 적습니다.)
◎ 1910년 1월 29일
"경성에서 하얼빈을 거쳐 마마자국이 있는 송선춘과 조병한이 황제폐하(고종을 일컫습니다)의 옥새가 찍힌 친서를 가지고 와 안중근을 옥중에서 구출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고종의 밀사들이 처음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각각의 용모에 대한 묘사와 함께 외국어 구사력 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1910년 2월 4일
"밀사를 위해 안중근과 그 유족을 위해 모은 돈을 사용하는 것은 안된다. 밀사에 대해 진위여부 확인이 필요하다"
아마 안중근을 돕던 한인들에게도 고종이 보낸 밀사의 존재는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나 봅니다. 진위 여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부분이죠.
◎ 1910년 2월 17일
"폐하의 옥새가 찍힌 밀서를 가지고 여순감옥의 안중근을 구해내어 우리 동포와 함께 힘을 다해 러시아 국의 재판에 맡기기 위해 왔다"
자, 밀사의 임무가 드러납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일본으로서는 죽이지 않으면 안될 큰 죄입니다.
고종도 이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격 사건 발생지가 러시아의 조차지라는 점을 이용, 안중근을 일본 법정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 세우려 한거죠.
◎ 1910년 3월 2일
"두 명의 밀사는 결코 가짜가 아닙니다. 한국인 스파이의 보고에 의하면 반일운동의 본원지는 논할필요 없이 고종황제라고 합니다. 지난해 10월 하얼빈 흉변(이토히로부미 저격사건을 지칭합니다)도 궁에서부터 선동한 것으로"
한국인 밀정(스파이)가 준 정보를 토대로 한 내용인데요, 고종이 안중근을 구출하려 하는 배후일 뿐 아니라 훨씬 전에 발생했었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서는 경찰청 통감이 외무대신에게 보낸 건데요, 앞의 총영사 보고서와 동일한 맥락에서 안중근의 변호사 비용을 고종 측근들이 댔다는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중근은 수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자신은 대한의군참모중장, 즉 군인이며 나라를 위해 헌신 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라고 여러번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또 당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비롯해 나라를 강탈한 일본과 전쟁중이었기때문에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일본법이 아닌, 만국평화공법에 의거한 육군 포로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래서 안중근을 개인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의로운 행동을 한 의사라기 보다 군인된 신분과 본분을 주장했던 뜻을 받을어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분들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일본은 안중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나라의 위대한 인물을 죽인 원흉을 사형시킬 수 없기 때문에 위 보고서에서 말한 것처럼 안중근이 군인이고, 고종의 뜻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형을 서둘러 집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경술국치 발생 99년.
위태롭게 기울어가는 나라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독립군들이 무기를 사는 비용을 지원하고, 안중근 의사를 구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했던 고종.
다는 이해할 수 없어도 고종이 느꼈을 비장함을 어설프게나마 공감하면서 무지에서 비롯한 저의 편견들을 바로 잡았습니다.
팝업보기 닫기
[편집자주] 2007년에 입사한 SBS 사회2부의 새내기 최고운 기자는 늘 밝은 웃음으로 사건팀에서 비타민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험한 사건사고 현장을 누비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을 잃지 않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최종편집 : 2009-08-30 17:3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