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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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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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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7-31
본문
손녀 손자가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싱가포르에 돌아오던 날은 구랍 31일이었다.
기러기 할아비의 시작이었고 손자와 함께 오가는 등하굣길의 예고였다.
뒤돌아보면 참 어려웠던 한해였다. 싱가포르에 오기로 마음먹기까지도 쉽지 않았고 소음과의 전쟁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불운은 역시 아내의 교통사고였다.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린 2008년 최악의 사태다.
어찌 보면 이 해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한 해가 너무도 소중한, 아니 일흔을 먹기가 두려운 나였지만 다시는 되돌아보기도 싫은 무자년(戊子年)이다.
그렇다고 전혀 의미 없었던 해도 아니었다. 손녀 손자가 아무 탈 없이 건강한 한 해를 지냈다는 사실은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는 행운이기도 했다.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고 불운이 있으면 행운도 따르는 게 세상살이인가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쳤다.
“잘 가라, 2008년이여~”
“오라, 행운의 2009년이여~”
어느 때와 같은 일과의 시작이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한 해를 마감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기도 하기에 뭔가 새로워야 했다. 일기장을 봤다. 365장의 마지막 한 장만이 하얀 속살을 들어내고 있었다. 이 한 장을 까맣게 채우고 나면 나는 영락없이 상늙은이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소음이 등장하고 집 주인과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의 실망과 분노가 적나라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느긋하게 대처하지는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때의 감정을 뭉개고 고쳐 쓸 수는 없는 것이 나의 일기장이다.
그 날 그 상황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 내가 쓰는 일기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는 이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노트와 볼펜이다.
일기장을 덮었다. 더 이상 들어다 볼 시간도 넉넉한 마음도 없었다.
내가 힘들어 얻어 놓은 HDB를 손녀 손자에게 선보이는 날이기에 가슴 설레었다.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이지만 오늘은 마음먹고 더 일찍 청소도구를 잡았다. 집안에 먼지 하나 없도록 털고 쓸고 닦았다. 특히 책장정리에 신경을 썼다.
방학 전에 살던 콘도에 비하면 아무래도 열악한 HDB의 환경과 분위기를 깨끗한 이미지로나마 각인시켜 주고 싶어서다.
철부지 아이처럼 마음이 바빴다. 두 달 만에 만나게 되는 보고 싶은 얼굴이기도 하지만 힘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에서 새벽 4시는 이렇게 부산했다.
기다리던 아침 6시에 전화기를 들었다.
손자들 아침밥 든든히 먹이고 옷도 잘 챙겨 입히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병원에 들려 할머니에게 꼭 인사하고 오라고 일러주었다. 사실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늙은이들의 노파심이다.
손자들을 태우고 오는 항공기의 창이공항 도착 시간은 밤 9시다. 시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설렌다. 8시에 집을 나셨다. 버스와 MRT를 번갈아 이용해야 하기에 일찍 서두였다. 창이공항과는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40분 만에 도착했다. 문제가 생겼다. 입국장의 출구를 찾지 못했다. 늘 갔다 왔다만 반복하였지 마중을 나가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10여분을 헤매다가 안내소를 찾았다. 아래층 10번 벨트를 알아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벨트 앞의 기둥에 아시아나와 칼 항공의 넘버가 붙어 있었다. 한국말을 하는 젊은 엄마도 여럿 있었다. 같은 또래였으면 말이라도 걸어보겠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대한항공 손님이 먼저 나왔다.
한참 뒤에 아시아나 손님들이 줄줄이 나왔다. 손녀와 손자를 만났던 시각은 30여분이 지났을 때다. 두 달 만의 만남은 반가웠다. 손녀는 키가 제법 컸고 손자는 얼굴이 둥글 정도로 살이 붙었다. 역시 아빠 엄마의 ‘사랑’이란 영양가의 덕인 듯싶다.
며느리는 내 얼굴이 야위고 머리카락도 더 희졌다며 안쓰러워했다.
20분이 채 걸리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를 둘러본 아이들은 새로 살 집에 대해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며느리는 아담하고 쓸모 있는 구조라며 괜찮다고 평했다. 나로서는 힘들어 얻은 집이지만 불편스러워 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럽다. 큰 방의 에어컨이 첫날부터 고장 나 체면을 구겼지만 일단 합격 한 셈이다.
손녀는 학교 가는 버스길을 익히기 위해 버스 베독 인터체인지에 갔다. 이사 이전대로 한 번 바꿔 타면 되었다. 나간 길에 도서관에 들렸다. 3층 도서관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꽤 큰 규모에 장서도 많았다. 책을 빌어볼 수 있도록 디포짓 50달러를 걸고 이용카드를 받았다.
손자의 등굣길은 걸어서 7분 거리다. 손자도 며느리도 만족했다. 내가 내세울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1월1일이다. 양력이지만 지난 해 한국을 떠날 때 양력설을 쇠기로 하였기에 우리 집으로 봐서는 설날인 것이다. 며느리와 손자들과 함께 마을 시장에 나갔다. 쇠고기 1 킬로그램을 9달러에 샀다. 며느리가 한국에서 준비해 온 가래떡으로 떡국을 끓어 먹었다. 감회가 남다르다.
며느리는 한국에서 만들어 온 시티은행 국제 현금카드로 시티은행 ATM에서 현금 1000달러를 시험 인출을 했다. 나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그동안 사용하던 POSB 카드는 아내의 귀국으로 폐기했었다. 시티 현금카드로 DBS(POSB) ATM에서도 인출되어 편리했다.
City 은행의 현금카드는 1회당 수수료는 1달러이고 인출 한도는 1일 미화 기준 3000달러라고 했다. 한국 시티은행에서 원화를 입금시키면 인출 당시의 환율에 의해 싱가포르 달러(SGD)로 환산되어 편리하다고 했다. 그 때부터 더욱 환율에 신경이 쓰였다. 환율 변동을 잘 읽으면 단 한 푼이라도 절약하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마음에서다. 그런데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한 환율은 늘 부담이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설쳐도 거의 한 번도 내림세에 맞추어 인출하지 못했다. 지금은 안정세도 보이고 있는데다 신경을 쓴들 마음만 상한다는 경험으로 환율변동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며느리는 딸과 아들의 등하교를 지켜본 뒤 싱가포르에 온지 사흘 만에 귀국 길에 올랐다. 나는 가슴조이며 손녀 손자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와 헤어지면서 행여 마음을 다치면 어쩌나 해서다.
공항까지 배웅하려 했으나 손자들도 며느리도 집 앞에서 헤어지는 게 낫다며 손 한 번 흔드는 것으로 헤어졌다. 그런데도 손녀 손자는 여느 때와 같이 잘 놀아주었다. 너무 고마웠다.
그럴수록 내 마음의 부담은 커졌다. 아이들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공을 최대한 좁혀야 하기 때문이다. 먹는 것 입히는 것 노는 것 등등 일상에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애들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다.
사실 그것은 애들의 종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또 버릇없는 아이 그리고 아이들의 자립심을 해치는 짓인 줄도 잘 알았다.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능력의 한계였다.
다음 날부터 아침 5시에 밥을 짓고 찬을 챙겼다.
손녀는 꼭 아침밥을 먹고 등교했다. 손자는 먹다가 말다가 하여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손자가 한술이라도 뜨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만 녀석은 할아비의 마음을 도통 몰라줘서 속상했다. 할미가 있을 때나 마찬가지다.
콘도에서 살 때와 달라진 것은 손자가 누나와 함께 등굣길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자는 걸어서 등교해야 하니까 따로 나가게 되었다. 아침 6시30분, 손녀의 가방을 버스정유소까지 끌어다 주고 되돌아오면 다음 차례는 손자와 함께 등교하는 일이다. 육교 하나를 넘어가면 손자가 다니는 학교다. 7분 여 거리어서 손자도 좋다고 했다.
아파트로 이사 와서 첫 번째 보는 덕이 버스를 타지 않고 등교하는 것이다.
할머니가 없는 지금, 아이들의 아침 메뉴는 달걀 후라이와 김이다. 때로는 우유에 시리얼(cereal)이다. 하루 고민꺼리 가운데 하나다. 이러다가 영양실조나 걸리면 어쩌나 싶어 애가 탄다. 아무리 머리를 짜도 요리솜씨가 없으니 마음만 있지 묘수가 없다. 엄마들의 노고를 알만하다.
생각 끝에 녀석들이 좋아하는 식품과 요리재료를 미리 마련해 두기로 했다. 손자가 좋아하는 소시지와 햄을 준비했다. 손녀는 푸성귀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김치와 숙주나물이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둘이 모두 잘 먹는 카레와 자장 요리법도 익히고 재료도 준비해봤다. 1. 쇠고기와 돼지고기. 2. 버섯. 3. 당근. 4. 감자. 5. 양파 등이다. 요리책에 나오는 그램 측량은 대충 눈 가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잡채도 메뉴에 넣었다.
그래도 다행스런 것은 집 앞에 있는 마을 시장에 채소와 육류 가게가 많다는 것이다. 언제나 나가면 구입이 가능해서 편리했다.
나름대로 1주일간의 메뉴판을 만들고 골고루 제공했다. 손자들도 그런대로 만족하여 좋았다.
요리솜씨가 익어가던 스무날 째의 일이다. 애비가 왔다. 손녀의 중학교 진학문제를 거론했다.
아이들의 장래를 우선순위에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조국을 아예 떠나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조기유학은 2~3년으로 끝내고 중.고등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다녀야 한다는 평소 나의 지론이 작용했다. 당초 계획은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다는 목표가 세워져 있어 애초 생각을 고쳐먹기가 쉽지 않았다.
확정까지는 1주일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손녀도 어른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1월 말로서 싱가포르 유학을 청산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갑자기 귀국한다는 바람에 학교 담임선생님도 당황했던 모양이다. 성적도 날로 향상되고 착한 어린이었다며 무척 아쉬워하더란다.
이렇게 손녀는 2월1일 싱가포르 유학생활을 2년 반 만에 접었다.
이제 손자와 달랑 둘이 남았다. 나의 심적 부담은 더욱 컸다. 손자는 누나만 있으면 어지간한 것은 견뎌내었던 터다. 그런데 손자의 버팀목이었던 누나가 떠나버렸다.
금쪽같은 손자라며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도 할아비로서 동심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순도 100%의 아빠 엄마를 대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세대의 간극을 넘을 수도 없다. 어차피 아이들의 감정과 행동을 함께 나누며 공유할 수 없는 마당에서 달리 묘안은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35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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