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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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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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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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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번째 통화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비자신청을 위한 첫째 관문이다. 싱가포르에 도착한지 이틀 만이다.
싱가포르에 전화 걸기가 일상화 되었다. 손녀 손자와 차례로 통화했다. 할머니가 계셔서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은 명쾌했다. ‘좋다’는 것이다. 뻔한 답변일줄 알면서도 짐직 물었던 것은 손자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노인네들의 마음이다.
손자는 나를 빨리 오라면서 자기가 키우던 어항속의 복어가 살고 있는지 물었다. 한 마리가 죽었다니까 애석해 했다. 하도 동물을 좋아하여 귀국할 때마다 열대어를 사다 날라 어항이 네 개나 된다.
일요일인 오늘은 할머니랑 ‘부기스’에 간다고 했다. 손자들이 할머니에게 쇼핑 몰 구경도 시켜주고 학용품도 사겠다는 것이다.
1월15일은 우리내외가 만난 결혼기념일이다.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날이다. 그리고 허전했다. 아내에게 전화하였다. 목구멍에서 맴도는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어젯밤부터 연습을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니까 망서러졌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해냈다. 아내의 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애쓴 보람이 있어 좋았다.
지난해 이 날의 해프닝이 떠올랐다. 우리는 공원을 돌다가 인근 5성급 호텔에 들어갔다. 아내는 점심 메뉴를 살폈다. 우리 식량으로 뷔페를 먹기는 돈 아깝고 한식은 비싸기만 하지 입맛에 맞는 게 없다고 했다. 나는 기왕 들어왔으니까 기분이라도 한 번 내어보자고 하였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냥 되돌아 나오는데 뒤통수가 부끄러웠다. 결국 늘 다니던 쌍계탕 집에서 공짜로 주는 인삼주 한 잔으로 축배를 들었다. 아내의 근검절약 정신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아내가 없는 오늘은 그런 웃음거리도 연출할 수가 없다. 손쉽게 끓인 미역국물에 밥 한 공기를 말아먹고 커피 한 잔을 마셨다.
4일째 되는 날 콘도를 얻었다는 전갈이다. 비자가 나올 때까지 가계약이라고 했다. 풀장이 크고 좋아 손녀 손자가 만족한다고도 했다. 손자들로서는 그럴 것이다. 풀장이 딸린 콘도에 살아본 적이 없어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더운 나라에서 풀장이 없는 집은 상상할 수 없었다. 선입견이다.
일단 집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아내는 어미가 들어오는 편으로 고춧가루를 보내 달라고 했다. 싱가포르 고춧가루는 맛이 없다는 것이다.
1월17일 예정대로 며느리가 싱가포르에 갔다.
다음 날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부엌 살림살이 주방기기를 사려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아내의 건강검진에서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폐결핵과 간염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며 내일 나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거리가 불거졌다. 한국에서 셋 달 전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는 아무 탈이 없었던 병력이 왜 싱가포르 병원에서 나타났느냐는 의문이 생겼다.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싱가포르가 까다롭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만약에 건강상 이유를 붙여 비자 발급이 거부되면 큰일이다. 모든 계획이 원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손자들은 또 다시 하숙집 생활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녀석들의 실망이 오죽하겠는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우리내외도 집을 세놓았으니 셋집을 얻어야 할 판이다. 콘도 계약의 무효에 따른 문제도 발생하게 될 것이고 그간 장만한 가재도구랑 오가며 쓴 비용도 만만찮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기를 빌어야 했다.
다음 날 병원에서는 폐에 염증이 있다며 10일 동안 약을 복용하고 재검증을 받자고 하더란다. 폐렴이라면 큰 일이 아닌가? 어떻게 갑자기 폐렴에 걸릴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놀러 다니다가 얻은 병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아픈 데가 있다는 것도 문제고 비자도 문제다.
열흘 뒤가 모든 문제를 판가름하는 운명의 날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멈출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갈 때까지 가야했다. 19일 이삿짐을 나르고 있다는 전화다. 이토록 답답한 속도 모르는 손녀 손자는 제들끼리 남 눈치 안보고 할머니와 살 수 있다는 기분에 한껏 들떠 있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게 얽히고 터질 지경이다.
아들은 아이들과 통화하더니 할머니와 엄마가 있으니까 아이들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사기충천하다고 했다. 외롭고 쓸쓸하다가 얼마나 좋겠는가. 물 만난 고기가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면에는 나의 쓸쓸함이 있다. 손자들이 알 리 없는 할아비의 속내다.
아내가 국내 여행을 다닐 때는 예사롭던 평상심이 국외에 갔다는 미묘한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그렇잖아도 모자라는 잠이 오지 않아 고통스럽다.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감정이 불면의 밤으로 이끌고 있었다.
날이 새자 이번에는 손녀 손자의 예방접종 증명서를 보내달라는 전화가 왔다. 입학 당시 학교에 제출하였을 텐데 왜 또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의 나라에 사는 서러움이다.
집에 보관중인 접종카드가 없었다. 여러 병원을 아 다녀야 했다. 이래서 모든 증명서는 원본 내지 복사본이라도 보관해야 했었다.
어미는 1주일 만에 귀국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계시니까 헤어질 때 섭섭하지도 않은 것 같아 마음 놓고 왔다고 했다. 다행이다.
싱가포르에 들어갈 막판 준비에 나섰다. 여권도 재발급 받고 채권정리도 하는데 까지 했다. 아파트 운영위원장직의 사퇴도 마무리 지었다. 홀가분하면서도 서운했다.
싱가포르의 많은 문물을 캠코더에 담기 위해 컴퓨터 외장하드도 두 개나 장만했다. 컴퓨터에 저장된 주요 문서와 사진과 동영상을 외장하드에 옮기는 작업도 끝냈다.
큰 손자와 오붓한 점심시간을 가졌다. 중국 요릿집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탕수육을 먹고 용돈도 주었다. 이제 운동화 끈만 매면 떠날 수 있었다.
아내는 며느리가 귀국한 직후 눈의 실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 돼 있다고 하여 걱정스러웠다. 검진결과를 보려 가야하는데 그 때까지 낫지 않으면 트집을 잡히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낯설고 더운 날씨에 신심이 많이 지치고 고단했던 모양이다. 다행이도 사흘 만에 나았다고 했다.
1차 검진을 받은 열이틀 째인 1월31일, 병원에 갔더니 이것저것 또 묻고 나서 진단서를 끊어 주더라고 했다. 그 길로 이민국에 달려가 비자신청서를 냈다고 한다. 할머니의 경우는 비자신청 사유서를 써 내야 하는데 손우락 사장과 여직원이 시종일관 매달려 모두 처리해 주었다며 감사 해 했다.
더디어 2월1일, 아내와 헤어 진지 20여 일만에 해후했다. 언제부터인가 만남의 기쁨도 손녀손자가 있어 뒷전으로 밀러나 있었다.
비자 때문에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전화도 할 수 없다. TV도 볼 수 없다. 인터넷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눈앞에 있어 숨이 막혔다.
이방인의 설음이 물밀 듯 다가왔다. 그 때로서는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비자에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처분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참 답답하고 막연했다.
손자들의 노트북은 새집으로 이사 온 뒤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집 주변에 공유기를 쓰고 있는 데가 있으면 인터넷은 될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내가 가져온 노트북(데스크톱 겸용)을 켜고 인터넷을 시도해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예상했던 인터넷이 잡혔다. 이게 웬 떡인가?
아이들은 환호했다. “아~ 된다.“고... 인근에서 사용 중인 공유기의 덕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무한한 감사를 보내야 했다. 녀석들은 20여 일간 목말랐던 인터넷 게임을 했다.
나는 으스댔다. 할아비가 오니까 안 되던 인터넷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한 첫 만남을 가졌다.
다음 날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싱가포르에 살기 위해서는 싱가포르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난해 한 달간 있었지만 수박 겉핥기였다.
우선 버스와 MRT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했다. 버스와 MRT 노선 지도를 찾았다. 인터넷 덕으로 어렵잖게 찾을 수 있어 좋았다.
그 다음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와 쇼핑몰을 아는 일이다. 손녀가 거의 다 알고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일요일을 맞아 손녀의 안내로 공산품 판매장으로 이름난 아키아와 대형마트인 자이언트를 찾았다. 우리 집에서 버스 편도 나쁘지 않았다. 인근에서 가장 큰 탬파니스 몰을 둘러보고 탬파니스 MRT 앞에 있는 아키아 셔틀버스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했다.
그 다음은 우리 집에서 가까운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아내와 인근을 걷기로 했다. 반경 2~3킬로미터를 운동 삼아 둘려보기로 했다. 건물 꼭대기만 보고 무작정 걸었다. 제법 큰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식당이다. 느끼한 음식냄새가 싫다. 코를 막을 수도 없고 숨을 멈추고 비켜갔다.
동네 의원이 줄줄이 보였다. 진료과목은 소아과 산부인과 등등 거의 모두 나열되어 있었다, 전문의인지 일반의인지 분간이 안 된다. CLINIC과 藥局이라는 간판도 낯설다. 의원 안에 조제실이 있어 우리나라와 딴판이다. 어쨌거나 미리 알아두었다는 성과를 거뒀다.
비자 신청의 절차를 밟기 시작한지 꼭 한 달만인 2월19일 비자가 나왔다는 통보가 왔다. 가디언 손사장이 2~3일 내에 이민국에서 만나자고 했다.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실 비자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애를 태웠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한 달이 일 년쯤 느껴졌던 일이다. 바람이 간절하면 시간은 더딘가보다.
이틀 뒤 나는 아내와 Lavender MRT 출입구 앞에 있는 이민국에서 손사장과 만났다. 민원인들이 겹겹이 줄지어 서있었다. 10여분을 기다린 끝에 초록색 글씨의 카드 한 장을 받아 질 수 있었다. 6개월간 싱가포르에 체류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다.
손사장과 이틀 뒤에 케이블 TV와 인터넷 전화 신청을 하자고 약속했다. 손사장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급한 성미에서 보면 답답하기는 하였지만 합리적으로 꼼꼼히 챙겨주는 손사장이 고마웠다.
이틀 뒤 손사장의 승용차 편으로 스타허브에 갔다. 인터넷 TV, 집 전화, 휴대폰을 패기지로 계약했다. 의무 사용기간은 1년으로 했다. 콘도 렌트 기간을 2년으로 하는 바람에 너무 많은 마음고생을 하고 있어 무엇이든 짧게 하고 싶었다. 선택의 기회를 자주 잡기 위해서다. 휴대폰 기기는 우리나라 LG를 선택했다. 품질과 상관없이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제품을 써야 한다는 지론이다.
누구보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두 말할 것 없이 손자들이다. 만화와 코미디 채널을 돌아가며 꼬박 두 시간을 보았다. 아들 내외가 아이들이 TV를 봐야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했었다. 제들끼리 낄낄거리며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이지요.“다. 유학 온 보람이 느껴졌다.
우리 내외가 볼 수 있는 채널은 KBS1과 아리랑으로 고작 두 개 뿐이다. 월 시청료 108달러짜리인 것이다.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것저것 걸리고 거추장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외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들에게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다듬게 했다.
‘비자의 난’을 겪으면서 말이다.
<33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싱가포르에서 누구나 겪고 사는 아주 평범한 일상적 이야기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도, 삶의 방식에 따라서도 약간의 차이는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잠깐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와 사소한 알거리라도 드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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