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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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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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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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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귀국하여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 온지 일주일째인 11월15일 토요일의 일이다.
3일 전부터 배가 아파왔다고 했다. 배탈 정도로 여겼으나 약발도 안 받고 계속 아프다고 했다. X-레이와 피검사를 하였으나 아무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 참 귀신 곡할 노릇이다.
오랫동안 자리에 누어있어 배에 가스가 찬 것 같다고는 하는데 확진을 받기 위해 정밀 검사를 의뢰하였다고 했다. 월요일에 초음파와 내시경 검사를 한다고 했다.
제발 가스가 찬 정도로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아팠다. 다리 수술을 한지 8일 만에 무려 12시간의 장거리 이동을 한 것이 무리가 아니었는지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제발 별일 없기만을 빌면서 시도 때도 없이 전화했다.
어제 밤중에 너무 아파 MRI 검사를 하였는데 요석과 담석이 의심된다고 했다.
이틀이 지나도 갈아 앉을 기미가 없다는 말을 듣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달랑 미역국 하나만 끓어 놓고 숟갈을 잡았지만 밥맛이 뚝 떨어져 수저를 놓았다.
담석에 돌이 생겼다면 예사 일이 아닐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정오가 지나도록 전화가 없다. 오후 1시가 지나자 더는 기다랄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전화를 자제하려고 했지만 고통스런 기다림은 곧 고문이었다.
또 다이얼을 돌렸다. 이번에는 맹장염이 의심스러워 외과과장을 호출중이라는 대답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병명조차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니 탈이 나도 여간 크게 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교통사고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왜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연거푸 주는가? 심성으로 따지자면 평생을 금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야 될 사람이 아니던가.
한국 시간 오후 2시45분의 전화는 실로 충격이었다.
급성담낭염으로 확진되었는데 적혈구 수치가 급격히 증가하여 곧 바로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곧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요일임에도 수술 팀을 모두 불려드렸다는 것이다.
눈앞에 뿌연 안개가 낀다. 오금이 굳어지고 심장이 요동친다. 아무 생각이 없다. 창가에 나가 북녘하늘만 멍하게 바라봤다.
교통사고 수술을 받은 지 16일 만에 또 수술이라니 기가 찬다. 엎친데 겹친 악운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기도밖에 없다.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무사히 수술을 마쳐 달라고 열심히 빌었다.
괘종시계의 똑딱되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귓전을 때렸다. 1초 1초가 애간장을 태웠다. 이렇게 긴장의 시간은 흘려 2시간이 지났다. 전화가 왔다. 전화기로 다가가는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전화였지만 얼른 받을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결과는 수술이 잘 끝나 회복중이라고 했다. 담낭을 송두리째 떼어냈다고 했다. 순간 또 한 번 놀랬다. 담낭을 떼어내면 어떻게 되느냐고 다그쳤다. 소화에 약간의 문제는 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맹장을 떼어낸 정도로 편히 생각하면 된다고 하더란다.
담낭의 크기는 원래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인데 염증으로 인해서 어른의 손바닥만큼 커진데다 3분지2정도는 이미 상해 있었다고 했다.
아들은 그나마 한국 병원에서 입원 중에 발병된 것도 행운이라고 했다. 일요일 날 외출 중이던 의사들이 신속히 달려온 것도 하늘의 가호와 조상의 은덕이라고 했다. 그만큼 긴박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엄청난 통증 때문에 한 때는 혼절까지 하였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급성 염증의 여파로 담석이 담낭 입구를 막으면서 일어났던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는 아들의 목소리도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며 위로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벌떡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아들과 며느리의 사회적 인지도가 사람을 살린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내 마음 한켠은 여전히 불안했다. 불행은 한꺼번에 닥친다는데 ‘또 무슨 병고가 벌어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영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극복하였으니 명은 길겠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2008년은 우리부부에게 있어 너무도 가혹한 시련의 한 해였다.
그 날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그간의 모든 재앙이 말끔히 날아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3층 효서 엄마가 오늘 밤 귀국하면서 김치를 가지고 왔다. 이제 고맙다는 인사조차 미안스럽다.
밤 9시께 아들에게 전화했다. 차마 전화를 바꿔 달라고 못했다. 울음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다고 하여 오히려 다행스럽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가 총 동원되어 간병을 한다니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내 휴대폰에 걸었다. 아내는 한참 만에 들릴 듯 말듯 한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물이 쏟아져 말을 못 하겠다.
겨우 추스르며 ‘이제 괜찮을 거요, 악 땜은 다했소, 부디 당신 몸만 챙기세요.’라고 겨우 겨우 말을 이었다. 타는 입술을 애써 적시던 아내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둘의 대화는 가련한 떨림으로 오갔다.
뒤늦게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틀 정도 지나야 마취에서 완전히 회복된다면서 3일간은 금식이라고 했다. 돌발 변수가 없는 한 1주일 이후부터 담낭수술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성한 사람들이야 하기 쉬운 말로 시간이 지나면 낫을 것이 병이라고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야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안하겠는가.
11월17일 손녀의 학교에 갔다. 5학년 책을 사기 위해서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이고 손자들의 새 학기 준비는 해야 했다. 학교 뒤편 빈 교실에 교과서 판매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판매원들은 책 목록을 보기가 바쁘게 영어 ‘테스트 북’과 ‘워크 북’ 그리고 과학책과 기타 참고서적을 금방 챙겨주었다. 중국어 책은 학기 시작 직전에 나온다고 했다.
손자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싱가포르에 왔으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래도 힘이 되는 것은 손자들의 재롱이다.
손녀는 돌아오는 토요일이 할머니 생신이라며 할머니의 예쁜 사진을 보내달라고 이메일을 보내왔다. 사진을 담은 축하 카드를 만들어 드리겠다는 것이다. 내가 늘 간직하고 있던 사진 가운데 잘 찍힌 셋 장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아내의 사진을 보았다. 촬영년도 별로 정리된 사진속의 아내는 예뻤다. 젊었을 적에는 앳된 아름다움으로 나이가 들면서는 성숙한 노련미로 다가왔다.
손자는 ‘클라리넷(clarinet)’를 샀다고 자랑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악기라며 빨리 배워서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색소폰 연주를 제일 좋아하는데 색소폰은 자기가 불 수 없어 두 번째로 좋아하는 클라리넷을 샀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악기의 왕은 그랜드 피아노이고 여왕은 클라리넷이라고 했다. 어디서 들어 배운 이야긴지 모르겠다.
사실 악기의 왕은 피아노가 맞다. 피아노는 가장 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어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그런데 악기의 여왕으로 지칭되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음질과 수려한 외모로 사랑받는 악기다. 그럼에도 손자가 클라리넷을 악기의 여왕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인지 틀리는 것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하기야 딱히 정해진 별칭이 아니니까 듣기 좋은 대로 붙이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손자의 악기 구입 이야기는 듣기 좋았다. 손자는 언제나 이랬다. 우리는 늘 손자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보면서 역시 어릴 적에 길러준 정 만큼 끈끈한 게 없는 모양이라고 말해 왔다.
손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할머니 소식을 전해 온다. 전화 목소리는 언제나 밝고 활기찼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 엄마와 함께 지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싱달러 환율은 950원대를 오르내렸다. 집 얻을 생각을 하니까 답답하기만 했다. 이럴 때는 역시 음악이 좋았다. 평소 트로트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왠지 조용하고 부드러운 클래식이 땅겼다.
시간이 날 때면 훗날 손자들에게 선물할 음악을 인터넷으로 내리받아 저장해 두었다. 대표적인 출처가 이성주가 보내오는 건강편지다. 오늘 밤 꺼냈다. 클래식 음악은 가을이라는 계절과 고독이라는 공간에 알맞다.
아내의 연이은 병고로 갈피를 못 잡고, 집 얻을 궁리에 머리가 아픈 오늘밤이야 말로 제격이다. 고독을 음미하면서 음악 감상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최선의 궁합인 것 같았다.
‘이브몽탕’과 ‘안드리아 보첼리’의 흐느끼는 듯 감미로운 음성의 ‘고엽’과 ‘스탄 게츠’의 색소폰 연주는 11월의 깊은 밤 내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낙엽이었다.
삶과 사랑 그리고 추억을 낙엽에 띄운 이 노래는 잠시나마 그간에 쌓였던 나의 나쁜 기억들을 한 순간 쓸어갔다.
야위어져만 가던 나의 영혼을 따뜻이 보듬어 주었다.
나는 솔직히 이 노래를 부르기는커녕 흉내도 못 낸다.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하지만 듣고 감동하는 정서는 젊은이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내 육신은 비록 늙었지만 정신세계는 그리 늙지 않았다.
내 사랑이 내 심장과 함께 아직 박동하고 있다.
내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동안은 결코 늙을 수없는 이유다.
<27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쪽지를 보내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집사람은 여러분들께서 염려하시고 격려하여 주시는 은덕으로 많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안의 연속성으로 인해 교통사고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못했습니다. 너무 지루하시지는 안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27회부터서는 순서를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닿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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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말이 너무 좋아 소개합니다.
-고엽-
<노래 : 이브몽탕>
오 그대 기억해주었으면
우리 다정했던 그 좋은 날들을
그 시절 삶은 더 아름다웠고
태양은 지금보다 뜨거웠지
낙엽은 무수히 쌓이는데
그래 난 잊지 않았어
낙엽은 무수히 쌓이는데
추억과 후회와 함께
북풍이 그들을 실어가네
차가운 망각의 밤 속으로
그래 난 잊지 않았어
그대가 불러주던 그 노래를
그것은 우리를 닮은 노래
그대 날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네
우리는 둘이 함께 살았지
날 사랑했던 그대 그대를 사랑했던 나
하지만 삶은 살며시 소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바다는 모래 위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리네
낙엽은 끝없이 쌓여드네
추억과 회한과 함께
그러나 내 사랑은 말없이 변함없이
언제나 웃으며 삶에 감사하지
난 너무도 그대를 사랑했지 너무도 아름다운 그대를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으리
그 시절 삶은 더 아름다웠고
태양은 지금보다 뜨거웠지
그대는 나의 가장 따사롭던 여인
하지만 후회해 무엇하리
그대가 부르던 그 노래
언제나 언제나 내 귀에 울리는데
그것은 우리를 닮은 노래
그대 날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네
우리는 둘이 함께 살아 있었지
날 사랑했던 그대 그대를 사랑했던 나
하지만 삶은 살며시 소리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바다는 모래 위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을 지워버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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