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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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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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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먹구름은 걷히는가.-

지긋지긋한 10월은 갔다.
11월 1일은 비가 오다가 활짝 개었다.
오늘의 날씨처럼 우리에게 드리웠던 먹구름도 걷히는가?
아내의 귀국과 쾌차의 희망이 엿보이는 11월이다.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보니까 아침 7시다. 모처럼 늦잠을 잔 것이다.
전화까지 할 수 있는 아내가 고마웠다. 그만큼 나아지고 있다는 청신호다.
전기매트와 한방파스를 찾아오라는 얘기다. 부랴부랴 챙겨서 나섰다.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택시를 탔다.
아내는 어젯밤 천둥번개가 치고 허리가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했다.
평소에도 날씨가 궂은 날이면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터인데다 수술까지 받았으니까 허리가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기저귀를 갈고 등과 허리에 파스를 붙였다. 그리고 전기매트를 허리 밑에 깔아주었다.  
8시 20분께 아침식사가 들어왔다. 우유에 시리얼을 타 먹었다. 20여분 뒤 아이들이 왔다.
아내는 손자들을 보자마자 얼굴이 해맑아졌다. 원래 참을성이 많고 낙관적인 성품이라 금방 평상심을 찾은 것 같다.

10시께 수술담당의사가 왔다. 수술한 쪽의 다리를 움직여 보라고 했다. 조금 달싹거렸다. 가슴은 답답하지 않는지, 기침은 나오지 않는지 상세히 물었다. 모두 괜찮다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는 언제쯤 탈 수 있겠는지 물었다. 휠체어만 탈 수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가장 듣고 싶은 대답을 들었다.
수술을 잘 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말을 건넸더니 도리어 고맙다며 악수를 청했다.  
12시 40분께 나온 점심은 수프와 죽과 닭고기요리다. 처음 보는 닭고기요리였다. 아내는 반쯤 먹다가 말았다. 병원 밥을 잘 먹지 못하는 것을 본 아들이 집에 가서 김밥을 말아오겠다며 손녀와 나갔다. 아들도 나를 닮아 밥도 잘 해먹고 원만한 반찬도 제법 잘하는 편이다.
3시 50분께 같은 동에 사는 13층 소연이 엄마와 3층 효서 엄마, 15동 선우 엄마가 왔다.
며칠 보이지 않아 손녀에게 물었다고 했다. 이렇게 큰일을 당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30여 분간 사고경위에서부터 수술까지의 이야기와 위로의 말이 오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13층 아주머니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은 한순간 숙연해 졌다.  모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들은 손수 말아 온 김밥을 엄마에게 먹여주었다. 아내는 서 너 개를 맛있게 받아먹었다. 아들의 손맛이 그렇게도 좋았던 것 같다.
바깥에 나가면 오래 견뎌내지 못하는 손자 때문에 나는 손자를 데리고 집에 왔다.
7시 반께 병원에 있던 손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연이네 부부와 효서 엄마가 저녁밥을 가져왔는데 병원에서는 바깥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집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간호사들에게 들킨 모양이다.  
30여분 뒤 셋이서 우리 집에 왔다. 두 아주머니 손에는 쇼핑백 하나씩이 들려 있었다.
순간 나는 너무 미안스럽고 감격해서 할 말을 잊었다. 냉장고를 찾기에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자반과 김치는 냉장고에 넣고 도토리묵과 국물은 싱크대에 두고 나갔다. 고마운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고 그대로 집에 주저앉았다. 마음이 많이 느슨해졌다. 아들이 있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래서 어려울수록 주변에 사람이 많아야 하겠다.
9시 30분에 아들과 손녀가 왔다. 손녀는 할머니가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휠체어도 탈 수 있겠다고 했다. 내가 늘 휠체어 노래를 불렸더니 손녀도 여간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이다.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한결 기분도 좋고 아픈 곳도 없다고 했다. 어지간하면 참는 성격이니까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많이 나아지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이번에는 21동 아주머니 둘이 왔다. 미역국과 양념돼지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가져왔다. 이렇게 신세를 져서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평소에 할머니가 덕성스러워서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나는 사실 숨기려고 했던 일인데 알려지게 되어 당혹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웃사촌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타국 땅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각방을 쓰는 처지기는 하지만 역시 아내가 없는 집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일기를 쓰고 밖을 내다봤다. 사고 지점이 바로 밑이다. 머리털이 삐죽 솟으며 소름이 끼친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행여 잠이 들었으면 방해가 될까봐 참아야 했다. 아들과 손자들은 한밤중이다. 뒤척거리다가 지샌 밤이다. 콧물이 주르르 흘렸다. 감기기가 있었다.
아침 일찍 아들이 만들어 준 김치볶음과 간밤에 이웃에서 가져온 미역국을 챙겨 나갔다.

7시에 정유소에 나갔다. 11월 2일 일요일어서 그런지 버스손님이 적었다.
병원 문도 빨리 열어줘서 아내 곁에 금방 다가섰다.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무척 평화로운 얼굴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간호사가 와서야 잠에서 깨었다. 빙그레 웃었다. 미안함과 쑥스러움이 담긴 미소였다.  
체온과 혈압이 모두 정상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혈압 약은 좀 더 부드러운 것 같다고 했다.
어젯밤 이웃 아주머니들이 다녀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눈치껏 김치볶음밥과 미역국을 내어 놓았다. 간호사들 몰래 참 맛있게 먹었다. 역시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이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밥을 먹었다고 했다.
간호사 두 명이 와서 욕실로 데려갔다. 샤워를 시켜 주었다. 모처럼 머리도 감고 몸도 씻어 너무 개운하다고 했다. 표정도 한결 밝았다.
아내의 MP3도 켜주었다. 노래 몇 곡을 들었다. 아내의 생일은 음력 11월 2일이다. 양력이지만 생일 같은 느낌이다. 이제 다 나은 기분이다. 그야말로 참 좋은 아침을 맞았다.

아이들이 10시께 병원에 도착했다. 콧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머리도 아팠다. 아내가 빨리 집에 가서 약 먹고 쉬라고 했다. 아들도 내가 있으니까 안심하고 좀 쉬라고 권했다. 나 역시 버티기가 힘들었다.
집에 오면 그냥 자리에 누어야지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세탁이 다 된 세탁물을 널어놓고 물도 끓였다. 뒤죽박죽이 된 집안 정리를 하고 청소하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오늘 낮에는 기를 쓰고 잠을 청했다. 약에 취해서인지 1시간쯤 깊은 잠을 잔 것 같았다. 우선 콧물이 멈춰서 살 것 같다.  
양념 돼지고기를 구어서 갔더니 맛있게 먹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빨리 나아서 보답하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해야지.’라는 대답에는 힘이 배어났다.

가디언이 왔다.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는 신호등과 상관없이 무조건 가해 운전자의 과실이라고 했다. 100% 보상을 받는 다는 이야기다. 퇴원 전에 경찰 조사를 받고 귀국하여 한국에서 받은 치료비까지 가해운전자가 가입한 보험회사에 청구하여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약간의 위자료도 나온다고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치료비는 피해자가 한 푼도 내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싱가포르는 그렇지 않다.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도 났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것은 우리는 외국인이고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행여 우리가 신호등을 위반했다고 우기면 어쩌나 걱정 했는데 횡단보도에서의 사고는 무조건 운전자 과실이라니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
닥터 박이 또 들렸다. 너무 고맙다. 어제 문병 왔던 아주머니가 ‘장가가지 안했으면 자기 집 예쁜 딸과 맺어주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장가를 들어 원통하다.’고 하였다는 말을 했더니 너틀 웃음이 입원실에 울러 퍼졌다. 이렇게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그 새 정들었다.

아내의 화장실 출입은 내가 도와서 할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옆으로 앉기가 일차 관문인데 어렵잖게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단계는 한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의자에 올라앉는 것인데 이 또한 잘 해 냈다. 아내는 화장실을 나서면서 입구 쪽에 있는 세면대의 거울도 보았다. 자기 얼굴에 관심을 가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저녁밥은 먹지 않았다. 수술자리가 좀 불편하다고 하여 걱정거리가 생겼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곁에서 자겠다고 했더니 규정을 어기는 것도 싫고 옆에 있으면 더욱 잠자기가 어렵다며 한사코 집에 가라고 했다.
10시께 병원을 나서야 하는데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불편한 환자를 두고 떠난다는 게 여간 힘들고 예사 괴로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다.
아이들은 모두 잠자고 있었다. 시장기가 심했다. 주방에서 선채로 밥 한술을 먹었다.  

  11월 3일 월요일이다.
아들은 북어국과 양념돼지고기 구이와 김치를 챙겨서 병원에 갔다. 나는 집안 청소를 했다. 마음먹고 깨끗이 했다. 곧 귀국하게 될 아내의 옷장을 정리했다. 13일로 예약된 항공권을 앞당기기로 하고 항공 예약업체에 전화했다. 8일자까지 변경할 수 있다고 했다.
아들에게 알려주고 조치하도록 했다.
병원에 확인 결과 8일 귀국이 가능하다는 확답을 들었다. 아들은 8일자 항공권 넷 장을 비즈니스 석으로 구매했다. 항공회사에 휠체어도 준비하도록 미리 통보했다. 한국의 형에게 전화하여 16인승 승합차를 9일 새벽 인천국제공항에 대기하도록 연락했다. 손녀와 손자 학교에도 방학 귀국을 닷새 앞당긴다고 통보했다. 나름대로 만전을 기한 셈이다.
11시 반께 아들과 임무교대를 했다. 나는 아주머니들이 가져다준 도토리묵을 싸들고 갔다. 아내는 맛있게 몇 개 들었다. 이웃의 배려는 우리 식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간호사들은 아내를 씻기고 수술부위를 드레싱 했다. 수술 자국을 처음 보았다.
대퇴부에서 무릎 쪽으로 무려 20센티 정도 절개됐다. 손톱만한 흉터 하나 없었던 아내다.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본인은 얼마나 속상하고 기가 막힐까? 나는 이럴 때면 곧장 운명을 입에 담는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젊은 시절 내 사전엔 운명, 팔자 따위는 없었다. 예순을 지나면서부터 ‘운명’이란 단어를 빌려 쓰기 시작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사관에 교통사고 소식을 전하면서 콘도 해약 여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기꺼이 받아주는데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곧 회신이 왔다. 에이전트가 주인과 상의해서 그 결과를 내일까지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오갈 때마다 마주쳐야하는 사고 장소가 너무 보기 싫었다. 애초부터 우리와 인연이 없었던 집으로 느껴져 단 하루라도 빨리 떠나가고 싶었다.
큰 아들내외와 막내아들로부터 전화가 불이 나게 왔다. 차 때문에 사고 소식을 알리면서 들통이 났다. 걱정될까봐 알리지 안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짧은 생각이었다. 얼마나 큰일인데 왜 감추었냐는 것이다.

다음 날 해는 떴다. 어김없는 자연의 현상이 경이롭다.
대사관에서 전화 왔다. 집을 세놓아 나가도록 하겠다는 답변이 왔다는 것이다. 우리 욕심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던가? 그것도 다행이다 싶었다.
병원측도 8일 퇴원에 따른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X-레이를 찍었다. 보증금 6000불은 이미 날아갔고 2800불을 더 내라고 했다. 순수 입원료와 일반 치료비다. 수술비와 특수진료비는 별도로 정산해야 된다고 했다. 나흘 뒤에 얼마가 더 나올지 모르겠다.
경찰서에서도 연락이 왔다. 사고 당시 함께 있었던 남편과 통역이 함께 Tampines 경찰서로 나와 달라는 것이다. 내일 가기로 했다. 그리고 모레는 조사 전담 경찰관이 병원에 와서 본인의 진술을 듣는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손녀에게서 배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다닌다. 한국말을 배운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정도 들었다는 이야기다.

                                                        <24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손자와 나는 일주일 전부터 귀국하는 날의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아침 손자는 등교하면서 ‘꿈인가, 생시인가?’라며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동안 ‘엄마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역시 자식은 부모가 키워야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는 6월27일 돌아올 예정입니다. 방학기간 동안은 1주일에 한편 정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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