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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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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생 (h12k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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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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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과 입원생활-3)
10월 30일이다.
사고가 난지 3일째가 되는 날이다.
이 와중에도 환율은 걱정거리다. 오늘 SGD는 955원이다. 입원비, 수술비, 치료비가 모두 환율과 직결되니까 신경이 무딜 수가 없었다.
아들과 8시 30분에 병실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 벨을 눌리고 노크를 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초조하고 불안했다. 밤 새 상태가 나빠지지는 안했는지 걱정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신경질도 났다. 기다리는 10분은 대단히 길고 애타는 시간이었다.
아내는 어젯밤에 잠도 조금 자고 아팠던 가슴도 낫고 다리 부기도 많이 빠졌다고 했다. 안색이 밝아진 모습이다.
아침밥으로 계란말이와 우유와 멜론이 나와 있었다. 오늘은 좀 먹여야 하겠다는 생각에 침대를 15도쯤 올리고 식사를 권했다. 아내도 배가 많이 고팠든지 뿌리치지 않았다.
계란말이 한 개와 우유를 마시고 멜론도 한 쪽 먹었다. 그만해도 다 나은 기분이다.
9시 20분께 수술담당의사가 주치의사와 함께 왔다. 아내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와 아들과 상담실에 갔다. X-레이 사진을 스크린에 비추고 상처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역시 두 가지 치료법과 그 장단점을 이야기 했다.
수술의 경우 마취 과정부터 설명했다. 가스마스크를 씌우고 허리에 반신마취를 한다고 했다. 수술 중에 과다출혈, 신경손상, 심장마비도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어제 주치의의 설명과 같다. 환부를 열고 골절부분에 금속판을 고정시키는 전 과정을 소상히 알려주었다.
수술을 받으면 1주일이면 휠체어를 탈 수 있으니까 항공기도 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6주 정도 치료하면 걷기 시작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는 기간은 약 9개월이라고 했다. 그 기간을 지나도 사고 전처럼 활발하게 걸을 수는 없다고도 했다. 완전한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수술을 하지 않을 경우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기까지 최소한 6주가 소요되는데 부작용이 많다고 했다. 누어있는 동안 허리와 가슴에 무리가 가게 돼 신장과 허파에 질환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검사 결과는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수술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병원에서 요구하는 보호자의 수술동의서에 서명하고 마취동의서에도 서명했다. 마취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수술 도중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도 병원과 담당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면책권을 인정하는 절차다.
아내를 안심시키는데 난감했다. 수술은 하고 싶지 않지만 미동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도 없다.
간호사가 둘이 왔다. 머리맡 문자판에 ‘NO DRINK FOOD(금식)’이라는 팻말을 끼우고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며 나가 달라고 했다. 아내는 기저귀를 갈아 끼운다는 낌새를 느끼자 사색이 되었다. 아내는 지금 갈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양했으나 수술 전에 갈아야한다니까 어쩔 수가 없다.
아내의 비명소리가 나의 심장을 도려냈다. 비명소리는 세 번쯤 연이어 들렸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집어 뜯었다. 아내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내 처지가 초라했다.
아내 곁에 갔을 때에는 아내의 눈에선 고통과 실의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사에 대한 회한의 피눈물이었다. 아내의 손은 차갑고 맥이 풀려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될지 몰랐다. 오늘 아침에도 갈아 끼었지만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다고 했다. 수술실 간호사들이 함부로 다룬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아내의 지혜는 번뜩였다. 대형 패드 속에 소변만 받을 수 있는 작은 패드를 하나 더 착용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문제는 자주 보는 소변이기 때문이다. 손녀의 생리에 대비해서 한국에서 가져다 둔 생리대를 생각했던 모양이다.
오후 3시 반께 아들과 손자들이 왔다. 녀석들은 아빠와 함께 있다는 기쁨에 할머니 아픈 것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저 즐거울 뿐이다. 생리대를 아내가 차고 있는 큰 패드위에 넣었다. 원체 조심하니까 덜 아픈 모양이다. 아내의 고안은 효과 만점이었다.
3시 40분 간호사와 수술침대가 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간호사는 밥 먹은 시각과 틀니가 없는지 물었다. 수술침대로 옮기는 마지막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와주려고 해도 간호사들은 안 된다고 했다. 아예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아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내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다. 그러나 ‘이번만 참아 달라.’고 빌 뿐이다.
아내는 비명의 메아리를 남긴 채 수술실로 향했다.
뒤따라갔으나 3층 중앙수술실 입구까지만 동행이 허용됐다. 보호자 가족의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수술 시간은 대략 두 시간이라고 하니까 마취와 회복시간을 감안하면 6시 반쯤이면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나름의 계산이다. 아이들은 넓은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재미가 있었다. 역시 철부지들이다. 나는 기도했다. ‘제발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하루속히 회복되어 집으로 보내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자리마다 보호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대수롭잖게, 또 어떤 이는 침통한 얼굴로, 모습이야 제 각각이지만 애타는 마음만은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병원 수술실 같으면 “마취 중. 수술 중. 회복 중.”이란 메시지가 모니터에 뜰 것인데도 이 병원은 없다. 답답하다. 자칭 의료선진국이라는 말이 민망하다.
시계만 보고 또 보고 했다. 마취는 잘 되었는지, 수술은 뜻대로 잘하고 있는지? 내 머리는 미로를 헤매기 시작했다. 5시 부터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바깥에 나가 왔다 갔다 해 봐도 떨쳐내지 못했다. 의사가 말하던 과다출혈과 신경손상이 자꾸 떠오르며 나를 괴롭혔다. 아들도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다.
그래도 시간을 흘려 6시가 되었다. 이제 눈길은 온통 수술실 쪽과 복도에 쏠렸다. 수술을 마친 환자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고 대기 중이던 보호자들도 한 사람씩 빠져나갔다.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아들의 시선이 맞닥뜨리곤 했지만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긴장의 시간이 10여분 더 흐르고 있을 때 더디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아내의 안색은 평온했다. ‘이제 됐다. 이제 살았어.’를 내심 외치며 입원실로 달려갔다.
아내의 입가엔 엷은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손을 잡고 ‘고생했어.’라는 말로 그 간의 모든 시름을 씻어냈다.
아들도 엄마의 손을 움켜쥐고 ‘괜 찮느냐.’고 물었다. 고개만 끄덕였다. 입이 마르다고 했다. 수술 받은 다리 쪽에 호수와 플라스틱 병이 달려있었다. 피가 조금 고여 있었다. 호기심 많은 손자들이 피가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언제까지 나오느냐고 물었다.
간호사가 왔다. 수술은 순조롭게 잘 되었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뒤따라 마취 의사가 왔다. 청진기를 가슴에 대어보고 발가락을 움직거려 보라고 했다. 안된다니까 아직 마취가 덜 깨었다면서 수술은 ‘굿’이라며 음지를 곧추 세웠다. 지금부터 밥을 먹어도 된다고 했다. 간호사는 어깨에 주사를 놓고 아프면 먹으라며 약을 두고 갔다.
이렇게 이틀 동안 고심하던 수술은 끝났다.
손자는 내일 학기말 마지막 시험이 있다고 했다. 아들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가라고 권했다. 간호사에게 수술 받은 오늘만은 환자 곁에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커튼을 쳐 놓고 있으라고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곳의 규칙이 그렇다니 오로지 고마웠다. 아내의 양쪽 다리 장단지에는 마사지기가 설치되어 주물어 주었다. 좀 시원한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간호사는 오늘 저녁은 1시간마다 수술경과를 체크한다고 했다. 밤 8시께부터 간호사들은 체온과 혈압을 재어보고 수술 자리도 살펴보았다.
아내는 물론이고 나 역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보호자용 베드가 없어 의자 두 개를 맞대어 보았으나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영시 5분 X-레이 실에서 왔다. 한참 뒤 아내가 왔다. 환부 밑에 서 너 번이나 판을 넣고 찍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크게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패드를 갈아 끼우는 것도 훨씬 수월했다.
수술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수술하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에 엄청 만족했다.
그 동안 너무 피로 해 눈이 저절로 감겼으나 토끼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10월의 마지막 날 31일의 먼동이 트이기 시작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마음은 개운하다.
아내는 수술부위가 가끔씩 쓰리고 허리도 아프다고 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5시께 간호사가 큰 패드를 갈아 끼었지만 비명은 없었다. 날이 밝자 청정에 매 달려 있는 버스 손잡이처럼 생긴 기구를 잡고 일어나려는 시도도 했다. 급진전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수술할 걸 괜히 늦추는 바람에 아내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겼다는 후회도 들었다. 뒤에 알게 되었지만 대퇴부는 어느 부분보다 예민한데다 미세한 움직임에도 골절된 뼈가 살을 파고드니까 그 통증은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들에게 전화했다. 경과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아들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등교하는 손자 안경도 닦아주고 용돈 2불씩 지갑에 넣어 주라고 일렀다.
아들이 7시 반께 왔다. 나더러 집에 가서 한 숨 자라고 했다. 너무 지쳐 보였던 모양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었다.
8시 반께 집에 왔으나 편히 쉬기는 글렸다. 아들이 엄마한테 빨리 오느라 집안 정리를 하지 안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아들이 끓여둔 미역국으로 밥 한 술을 얼른 먹었다.
손자들이 방마다 헤집어놓은 옷가지와 책을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1시간쯤 땀을 흘리고 샤워를 했다. 그 간의 찌든 피로가 싹 씻겨 내렸다.
침대에 기대보았으나 마음은 온통 아내에게 가 있어 더는 머물 수가 없었다. 세탁물을 늘어놓기가 바쁘게 집을 나섰다.
사고를 당했던 그 횡단보도를 걸어야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차올랐다. 머리를 흔들어 ‘잊자’고 했다.
11시께 병실에 도착하자 아내는 한결 더 편안해 보였다. 집도 의사가 다녀갔다고 했다. 밤중에 찍었던 X-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수술은 매우 잘 되었다고 하더란다. 몸도 닦아주고 기저귀도 갈았는데 견뎌 낼만 하였다는 것이다. 너무 반갑다. 아이들 때문에 아들은 집에 갔다.
점심은 수프와 쇠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과일이다. 아내에게 수프를 먹여주고 스테이크도 잘게 잘라 먹여주었다. 오랜만에 절반쯤 먹었다. 아들이 식사 주문을 잘 했었다.
1시 20분께 의사가 왔다. 수술 자리에 꽂아 두었던 호수를 뽑고 그 곳을 몇 바늘 꿰매었다. 아파하였지만 잠깐이었다. 링거도 뽑았다. 혈관 주사용 바늘만 손등에 꼽혀 있었다. 깔끔하고 시원했다. 이미 다 나은 기분이다.
아들이 손자들을 다리고 왔다. 평소 영어 시험은 겨우 패스만 하던 손자가 이번 시험에서 74점을 받았다며 자랑했다. 할머니가 ‘우리 손자 참 잘 했다.’며 손을 잡아 격려해 주었다.
6시 반쯤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생선구이와 야채다. 아내가 절반쯤 먹고 나머지는 손자들이 먹었다. 집에서는 좀처럼 먹을 수 없는 생선이다.
닥터 박이 왔다. 아들과 인사했다. 오늘은 자기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했다. 아내와 지난 4월에 결혼했고 나이는 25세라고 소개했다. 국적도 바꾸지 않아 당당한 한국인이라고 했다. 참 자상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다.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부인의 전화를 받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며 나깠다. 같은 핏줄의 동포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정이 땅기는가 보다.
손자들과 아들을 집에 보냈다.
재활 팀이라며 젊은 여자 두 명이 왔다. 먼저 다리운동을 해야 부작용이 없고 빨리 낫는다고 했다. 옆으로 돌려 눕히기도 하고 침대 끝자락에 앉혀보기도 했다. 크게 아프지 않게 잘 했다. 다리를 구부렸다 펴는 운동은 스스로 하지 못했다.
지금의 문제는 허리 통증이다. 타월을 허리 밑에 말아 넣었다. 좀 낫다고 했다. 그래서 오래 누어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내는 5분 간격으로 눈을 붙였다가 깨었다가 반복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난 46년간의 결혼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참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다. 용케도 참고 이겨낸 아내가 덧없이 안쓰럽고 감사하다.
오늘은 함께 지낼 수 없는 날이다. 4일 간의 공포와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와 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밤 10시 아내를 뒤로 하고 집에 갔다.
<23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과찬과 격려의 글을 주신 jsing 님, 유월 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27일 밤 내 사랑하는 손자와 함께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우리 집에 갑니다. 창이공항에서 저를 알아보시거든 말씀하세요. 커피 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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