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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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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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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던 날-
      (수술과 입원생활-2)

수술 담당의사와 통역이 끝나자 가디언은 밤 8시에 오겠다면서 급히 나갔다. 출근시간에 쫓겼다.
아내는 아침밥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입이 쓰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미지근한 물로 입만 헹궜다, 주변에는 문병 온 중국 사람들로 왁자지껄 했다. 아내의 바로 옆 베드에는 70대 후반의 중동 사람 같은 할머니가 혼자 있었다. 말은 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서로서로 안쓰러워하는 눈치다.
얼굴이 거무스레한 30대의 간호사가 왔다. 미소를 던지며 ‘굿모닝’하고 인사했다. 우리도 엉겁결에 ‘굿모닝’으로 첫 대면이 시작되었다. 링거액 팩을 만지작거리면서 속도 조정을 했다.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혈압을 재었다. 그리고 약을 베드 옆에 있는 사물함 위에 얹었다. 체온과 혈압수치를 차트에 적고 무엇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의 입만 바라보았다. 간호사도 답답한 모양이다. 코리언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약은 밥 먹고 세 번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수화를 한 셈이다. 벙어리가 따로 없다.

조금 있으니까 40대의 간호보조원 같은 여자가 왔다. 기저귀를 가져 왔다. 나를 나가달라고 눈짓을 했다. 커튼을 치더니 기저귀를 끼우는 것 같았다.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몸을 전혀 움직거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 한 두 번도 아닐 터인데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아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얼굴엔 땀이 맺혀 있다. 고통의 정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손을 붙들고 얼굴을 닦아주면서 조금만 참으면 곧 나을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기저귀를 갈아주던 아줌마가 베드마다 돌아다니며 무엇인가 묻고 적고 있었다. 이제 현지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도 두렵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어 때문이다.
아줌마의 거동으로 보아 후식과 점심을 주문받고 있는 것 같았다. 후식은 커피 또는 밀크와 빵 가운데 어떤 것을 먹겠느냐는 말 같아 ‘밀크’라고 했더니 적어 갔다.
얼마 뒤 밀크를 가져왔다. 옆 베드에서 커피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밀크 잔을 베드 끝에 있는 탁자에 놓고 돌아서는 아줌마에게 엄지손가락 하나를 내세우면서 ‘커피’라고 했다. 빙그레 웃으면서 커트에서 커피 한 잔을 꺼내 따라 주었다. 아내에게 우유를 먹였다. 얼굴만 옆으로 돌려 먹여 주려고 하니까 여간 힘들고 부자연스럽지가 않다. 빨대도 동원했지만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겨우 몇 모금 먹였다.  
긴 한숨을 내쉬고 커피 잔을 잡았다. 이미 식었다. 그래도 맛이 있었다. 이래서 입맛이 밥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힘든 오전이 지나가고 정오가 되었다.      

  식사가 나왔다. 죽과 샐러드와 빵이다. 아내는 아무것도 먹기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계속 굶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아플수록 많이 먹고 기운을 차려야만 하니까 어떻게든 한 술 뜨라고 자꾸 권했지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대로 물리기가 아까워 빵은 내가 먹었다. 나도 배가 몹시 고팠을 때였다. 우리나라 빵맛과 달리 느끼했으나 그냥 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손자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손자는 빨리 올 때는 1시50분이면 집 앞 정유소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손자들을 걱정한다는 낌새를 금방 알아채고  집에 다녀오라고 했다.
차마 혼자 두고 나갈 수가 없었으나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할 손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1시께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늙은이 둘만이 달랑 병실에 있다는 게 서글프고 외로웠다. 잠시나마 또 혼자 두고 나가려니까 발길이 무겁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뎌서 이겨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들과 청소 아줌마들이 쉼 없이 들락거렸다.
병실은 넓은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환자 곁에 둘려 앉은 문병객들이 부러움으로 다가왔다.
버스 승강장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우리 콘도 앞으로 가는 5번 버스를 기다렸다. 가슴은 콩당거리고 초조한 마음은 바쁘기만 했다.

며느리가 전화했다. 몇 번을 시도했으나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죄송하고 떨려서 전화 드리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애비는 어젯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했다. ‘우리 엄마 얼마나 아플까’하며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손자들을 버스 정유소에서 만나 집에 들어왔다. 점심 반찬은 가장 손쉬운 계란 후라이와 김과 소시지로 때웠다. 과일까지 먹였으니까 먹일 것은 거의 챙겨 먹인 것 같다.
손자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할머니와 손자들의 인사법은 마주 보고 미소 짓는 것이 전부다. 한 살 더 먹은 손녀만 ‘좀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손자는 쑥스럽다고 여겨지는 언행은 아예 못한다.
아내에게 ‘아들이 엄마 생각하며 밤 새 울었다’는 며느리의 전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내의 눈시울이 달아오르며 금 새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만큼 아내의 가슴에는 분명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자식이 있어 그래도 좋다는 생각일 게다. 자식으로 하여금 겪어야하는 고초가 아무리 크다 해도 어쩌겠는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몽땅 떠안고 가야하는 것인걸...
손자가 물이 먹고 싶다고 했다. 구내에 세븐일레븐이 있었다. 식당은 물론이고 약국, 안경점, 의료기상, 과일점, 등 많은 상점들이 있어 바깥 상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후 6시쯤 저녁식사가 들어왔다. 치킨 요리와 돼지고기 국물이다. 낮에 주문받는 아주머니의 물음에 무작정 고개만 끄덕였더니 뜻밖의 상이 차려진 것이다. 식사를 나르는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내일 식사를 주문 받았다. 손녀가 내일 아침 메뉴를 보고 수프와 쇠고기 스테이크를 골랐다. 영어가 통하니까 얼마나 수월한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와 달리 병원식은 환자의 주문에 따라 나왔다. 금식이 아니면 환자 본인의 자유식이다.
아내는 저녁밥도 못 먹겠다며 물만 마셨다. 저녁밥은 아이들의 몫이다.
7시께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서 저녁을 챙겨 먹였다. 마음은 언제나 병원에 있어 집안일은  대강대강 해 치었다. 아빠를 보고 자겠다고 기다리지 말고 밤 9시에 꼭 자라고 일렀다. 그리고 물먹기부터 에어컨 조정과 이불 덮기까지 세세히 말해 주었다. 이미 자기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나이지만 모든 뒷바라지를 우리가 도맡아 하다 보니까 손자들로서는 낯선 일이다. 이게 소위 과보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5번 버스가 정유소를 막 떠나려고 하여 손을 흔들며 정신없이 뛰었다. 고맙게 기다려 주었다. 숨은 차고 땀은 비 오듯 흘렸다. 1인 3역을 하기란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다.

헐레벌떡 병원에 들어섰다. 복도를 가운데로 양쪽 세 군데의 엘리베이터를 보느라 눈동자가 바쁘게 굴렸다. 촌음이라도 빨리 타기 위해서다.
아내의 얼굴부터 먼저 살피는 게 습관이 되었다. 여전히 피로한 안색이었다. 기저귀를 갈아 끼우는데 무척 아팠다고 했다. 하루에도 너 댓 번씩 반복해야 하니까 정신적인 공포와 불안감이 예사롭지 않다.  
가슴 부위도 아프고 열도 있었다. 무엇보다 다친 곳이 많이 부었다는 것이다. 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염증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수술을 미루다가 더 큰 화를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머리가 어지러워 졌다. 아내는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기저귀에 소변을 보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한 번 화장실을 가는 데는 간호사 둘이서 붙들고 겨우 휠체어에 몸을 얹어야 했다. 그렇게 화장실을 드나들면서 문제를 더 키운 것 같아 애가 탔다. 간호사에게 영어 단어 하나에 손짓으로 하는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 상태를 물어본 것이다. 열을 재고 여러 가지 체크를 하더니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일 단 안심이 되었다. 아들이 오면 수술 여하를 빨리 결정하고 조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가디언이 약속 시간에 와서 창이공항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아들이 무척 기다려진다.

밤 9시 반께 젊은 의사가 다정스레 다가왔다. 한국인 의사 ‘닥터 박’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오늘 당직인데 간호사실에 들렸다가 한국인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우리말은 어둔했지만 너무 잘생기고 상냥스럽다. 이 병원에 우리나라 의사가 있었다니 꿈같기도 했다. 자연스레 사고 이야기가 나오고 닥터 박이 싱가포르에 근무하게 된 사연도 나왔다.
자기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영국 의과대학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부인의 나라 싱가포르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인과 함께 이 병원에 근무를 희망했는데 채용 인원에 묶여 서로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5개의 국립병원이 있는데 자기는 이곳 동쪽 병원에 부인은 서쪽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기는 비뇨가과 전문 레지던트라고 했다. 부모는 지금도 스페인에 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싱가포르에 오게 된 동기는 처갓집이 있다는 사실보다 싱가포르가 노리는 ‘동남아 메디컬 허브’ 계획 때문이라고 했다. 대형 병원을 건설하고 최첨단 의료시설을 확충하여 주변 국가의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그 일환으로 싱가포르 의과대학 정원도 지금의 두 배쯤 늘인다고도 했다.

역시 돈벌이에는 과히 천부적인 나라다. 이 또한 따지고 보면 리콴유의 경제정책 뿌리는 우리나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이라고 한다. 박정희의 근대화 경제정책을 이미테이션 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박근혜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대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국부 이콴유와 박근혜의 인연은 박정희와 이콴유의 첫 만남의 자리에 박근혜가 통역을 하게 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난번에 개인 박근혜가 국빈으로 초빙되어 싱가포르를 다녀간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닥터 박은 이런 이야기를 하느라 20여분 지체하다가 갔다. 물론 자주 오겠다는 인사를 하고서 말이다.
사람 사는 인연이 모두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묘한 감정과 여운을 남긴다. 우린들 언제 싱가포르에 가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더더구나 교통사고를 당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했을까?

밤 10시께 아들이 병실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모자가 보자마자 손을 잡고 울먹거렸다. 서로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다분히 주변을 의식하는 인내였다. 그렇게 모자의 만남은 통절했다. 한국의 정형외과에서는 비행기만 탈 수 있으면 귀국해서 정밀검사를 거쳐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란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태로 보아서는 빠른 시간 내에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쨌건 내일 아침에 담당의사와 진지한 의견교환을 하기로 했다.  
가디언은 자기 승용차로 우리 집까지 태워다주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미안해서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역시 환자만 두고 나가야 했다. 아들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어떻게 하든 빨리 낫도록 하겠다.’며 안심시켰다.
밤 11시 나는 아들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발걸음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 때까지 손녀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가 오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부녀는 껴안고 뺨을 비비댔다. “부모는 자식을, 그 자식은 또 그들의 자식을 사랑한다.” 이것이 내리 사랑이다.    
                                                     <22회에서 계속>
  
드리는 말씀 : 너무 과분한 격려를 주셔서 얼마나 고맙고 힘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니 님, 한국인 님, 케빈 님, 벌서이년 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울러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쪽지로 보내 주신 여러분께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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