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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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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러기 할아비의 이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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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9-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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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학 결심과 싱가포르 선택 -

오늘은 2006년으로 되돌아 가볼까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한 달여 전부터 손자들의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많이 꺼냈다.
손자들도 외국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무조건이다.
우리 내외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10월에 접어든 어느 날 손녀와 손자를 싱가포르에 유학 보내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이유는 이렇다.
제들 주변 사람들은 거의 모두 미국 캐나다 영국까지도 조기유학을 보냈다는 것이다. 제들은 우물쭈물하다가 맨 꼴찌라는 이야기다. 충동 유학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어디 우리가 철없는 아이들입니까?’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은연중의 경쟁의식과 영어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의사 누구는 2학년 때 미국으로 보냈고 교수네 집은 캐나다로 보냈다는데서 부터 조기유학학부모들의 신상이 줄줄이 쏟아진다. 세계가 1일 생활권의 글로벌시대에 영어를 모르고서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은 물론이다.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치안상태가 세계 최고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안전상 문제가 없고 거리도 가까워 자주 가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의 70%가 중국인이어서 영어보다 중국어를 더 많이 쓰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세계의 언어가운데 사용하는 인구를 따지면 영어보다 중국어가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인 여건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시장은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교류의 파트너이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어를 모르고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조기유학을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의 조령모개 교육정책과 학생과 학부모를 혹사시키는 교육환경에 있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이미 출국일정까지 잡혔고 하숙집도 마련되었다고 했다. 사실 그 당시 싱가포르에 대한 정보를 가진 주변 친지들이 없어 전적으로 유학원에 의지했던 모양이다.
한국촌만 알았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보 부족이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엄마나 아빠가 함께 갈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내외가 갈 수도 없는데 이제 겨우 열 살, 열 한 살짜리 아이들을 이역만리타국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우려했다.
  ‘아이들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원론에 할 말이 없다. 사실 우리 내외야 무슨 대안이 있어 끼어들고 말리겠는가? 그저 걱정이나 하는 노인네일 뿐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속도전이다. 그 흐름에 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낙오가 된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11살짜리 손녀가 나이에 비해 무척 당차고 똘똘한데 믿음이 갔다.  그리고 누나보다 한 살 적은 손자는 누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찰떡궁합이어서 둘이만 함께 있으면 별 문제 없으리라는 기대는 있었다.
문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이 없는 아이들만의 타국생활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아들내외는 아이들이 적응을 잘 할 것이라고 애써 말하지만 하루에도 꼴 백번 보고 싶고  걱정되어 어떻게 버텨낼지 의문이다.
그 무엇보다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행여 아프고 다치기라도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참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아들과 며느리의 과감한 결단과 이를 흔쾌히 따라준 손자들로 하여 싱가포르 유학은 시작 됐다.  
산야에 붉고 노랑물결이 일렁이든 10월 중순이다. 이름 하여 조기유학길에 오르는 손자들의 크고 작은 보따리는 늙은이의 가슴을 헤집는다.  
할아비와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 없는 녀석들은 마치 인근 바닷가에 소풍가는 양 그저 즐겁고 명랑하다.
공항으로 가는 승용차에서 할머니는 손녀 손자를 껴안고 애써 눈물을 감췄다. 공항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즐거워도 나오고 슬퍼도 나오는 눈물인가 싶다.
공항 대합실은 여행자들로 부쩍 거렸다. 손자들은 제들 안방인양 휘젓고 다니며 장난을 쳤다. 오늘만은 말리고 싶지 않아 보고만 있었다.
더디어 탑승수속이 시작됐다. 손자들과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의 시각이 코앞에 멈췄다. 코끝이 찡했다.
우리 내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잘 먹어야 한다. 누나 말 잘 듣고 동생 잘 돌봐야 한다. 많이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며칠 전부터 수없이 되풀이 했던 말이다. 더 할 말도 없다. 해봐야 귀에 들어올 리도 없을게다. 출입장 저 너머로 사라져가는 녀석들에게 마냥 손만 흔들어 댔다. 손자들도 크게 한 번 답례의 손을 흔들며 만리 길 싱가포르를 향했다.
우리는 되돌아오는 승용차에서 한 동안 침묵했다. 아내의 눈시울엔 가는 이슬이 송송히 맺혀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내 손도 힘이 빠졌다. 꼭 이렇게 철부지 어린애들이 유학을 가야 하나?
도회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컸던 우리네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비록 먹고 입을 것은 없었지만 가족은 함께 살았다. 이별의 아픔도 몰랐다. 대국(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오순도순 정 나누며 허허 웃고 살았다.

일주일 뒤 아들은 돌아왔다. 아내는 다급했다. 아이들은 어떠냐고? 아무 생각 없이 잘 있으니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여전히 불안 초조한 것을 어쩌랴.
아들 셋에 손자가 다섯 있지만 열 살짜리 이 손자는 유별나다. 태어나서 여섯 달 만에 우리 내외의 손에 컸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우리 집에만 오면 꼭 할머니 품에서 잤다. 우리에게 대한 애정 표시도 남다르게 정겨웠다. 그런 녀석이 할머니와 부모의 품을 떠나 말조차 통하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애끓지 않겠는가.
글로벌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인가?
첨단 시스템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이후부터 나는 끝없는 자문자답에 빠져들곤 하였지만 정답은 없다.  

한 달 뒤 며느리가 돌아왔다. 주변에 연수를 핑계로 셋 달을 비운다고 말했던 상황에서 의외다. 이유는 아이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적응을 잘하는 것 같아 자기시간을 헤비하지 않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숙집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자식처럼 좋아하고 제들보다 더 잘 챙겨주어서 생활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더라고 했다. 손자들도 스스럼없이 금방 따르고 그 집 두 딸도 녀석들을 무척 예쁘게 여겨서 마음 편했다고도 했다.
가장 미덥고 고마운 것은 하숙집 주인이 자기 방을 내주고 아주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를 한다는 것이다. 잠꼬대가 심한 녀석들이 밤새도록 에어컨을 켜고 자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한시름 덜었다고 했다.
정말 감사하고 축복받을 분들이다.
집사람은 ‘복 많은 녀석들이라 어디를 가나 귀여움을 받는다’며 한참 자화자찬이다.  
국립초등학교의 학기 시작이 1월이라서 당장 입학은 할 수 없어 우선 한국인 학교에 다니도록 하였다고도 했다.
헤어질 때 한국에 되돌아가겠다며 울지 않더냐고 물었더니 공항에 배웅 나와서도 싱글벙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는 듯 손만 흔들더라고 했다. 우리 내외는 ‘그 녀석들 아무래도 유학체질인가보다’라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라고 다 기쁜 웃음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달래는 자위의 한숨이라고나 할까. 아들과 며느리 역시 남모르는 눈물깨나 흘렸을 것이다.

이때부터 정액제 국제전화는 불이 났고 화상 인터넷 전화도 시도되었다.
두 달 뒤 제들 애비가 싱가포르에 다시 가서 두 녀석 모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했다. 영어 때문에 손녀는 3학년에 손자는 2학년에 한 학년씩 낮춰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둘이 같은 학교에 함께 다니지 못하고 각자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초등학교부터 등급이 있는 싱가포르 국립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영어와 수학이 수학능력측정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것이다.
손녀는 유치원 때부터 영어공부를 하였지만 손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학원에 서  너 달 다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합격하여 학교에 다닌다고 하니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걱정거리는 여전하다.
입학은 하였다지만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배울 수가 있을까? 피부색조차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활발히 생활할 수 있을까?
오누이가 같은 학교에 다녀도 서로 큰 의지가 될 터인데 그마저 안됐다니 금심이 클 수밖에 없다.
손녀 손자의 조기유학은 이렇게 출발되었고 그 이후 과정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그 이후 이야기는 차후 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드리는 말씀 : 토요일에 올릴 예정인 5편은 ‘나의 교육관’과 조기유학 붐을 접목시켜 논쟁거리로 띄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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